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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이 아빠 Jan 22. 2022

EP10. 취미에 대한 고해성사.

읽지 않은 카톡의 빨간색 개수가 늘어간다. 하지만 핸드폰 진동은 울리지 않는다. 무음으로 해놨기 때문이다. 단톡방 나가기를 클릭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족쇄의 느낌... 대학 동아리 OB클럽 방이다.

위로는 25기 정도, 밑으로는 15기 정도 차이가 난다. 눈도 못 마주칠 기수의 선배들과 까마득한 후배들이 가득한 그 방. 그곳에서 주류들은 열심히 빨간색 개수를 올리고 있다.


온화한 표정의 4학년 선배 권유로 동아리에 가입했다.(실제로도 그 형은 매우 온화한 성품이다)

"바다의 파도와 바람 그리고 정열을 느껴보고 싶지 않니?..."

초코파이와 음료수를 같이 건넸다.

'심쿵...'

대학의 낭만과 불타는 청춘을 꿈꾸던 그 미천한 중생은 미끼를 덥석 물어버렸다. 거기 들어가면 죽는다, 맨날 굴러다닌다 소문이 자자 했지만, 고등학교 3년간도 풍물부 활동을 한지라 당연히 동아리 활동은 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뭔가 남들이 하지 않는 특별한 것을 해보고 싶기도 했다.


"우리는 잘 버텨보자"

"동기들이 풍성한 기수를 만들어 보자"

"내는 절대 탈퇴 안 한다. 여기가 딱 내 적성이다, 이 정도는 체력에 부하도 안걸린데이."

"야야  나가면 안 된다. 동문선배가 꼭 버텨보란다."

"그래? 오케이 니들 절대 탈퇴하면 안된데이. 나가면 알제? 직이뿐다이~"

낚시 바늘이 아직도 걸려있는 예닐곱 명의 동기들이 의쌰의쌰 하고 있다. 선배들이 우리는 메니져 안 키운다, 여학생도 선수로 키운다며 엄포를 놓았지만 여학생도 한명 입단했다. 1학년이 이 정도 숫자면 대기수라고 한다. 흐뭇한 중생들끼리 어깨동무하고 힘을 내본다.


매끈한 웻수트를 입고, 바람을 타고, 파도를 가르며, 드넓은 망망대해를 향해 키를 잡는다. 상상 속의 모습이다.

하지만 운동은 항상 기본기가 중요하다. 기본은 바닥부터 기는 거다. 멋진 웻수트는 너덜너덜 걸레짝이나 다름없었고, 드 넓은 망망대해는 시멘트 바닥과 아스팔트 바닥이 되어, 흙먼지와 돌멩이 가루들을 가르며 뒹굴고 있었다. 나는 그래도 수영을 좀 즐기는 편이라 괜찮았지만, 생존수영법 훈련이라도 하면 물과 조예가 전혀 없는 동기들은 생사를 넘나들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얼굴은 웃고 있다. 즐기면서 단련을 하고 있는 것이니 오해는 하지 마시길 부탁 드린다^^

 

얼굴이 하얗고 쁘장했던 것으로 기억되는 여자동기가 먼저 포기했다. 체력이 달린다는 이유였다. 얼마 뒤 한 녀석이 학업에 집중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탈퇴를 선언했다. 바다에 나가는 장비를 다뤄야 하기 때문에 운동 외에 여러 부속품을 챙기는 일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또 얼마 뒤 다른 동기가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탈퇴를 선언했다.


이제 남은 네 명이 똘똘 뭉쳤다. 우리는 잘 버티고 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조금만 더 힘을 내자, 다시 한번 의쌰의쌰다. 기초체력을 다지는 일은 힘들었지만, 파도를 가르며 바람을 타고 있으면 가슴이 뻥 뚫렸다. 부서지는 파도에 가끔 짠내가 눈 코 입으로 들어오지만 그 시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바람을 이용하여 파도를 가르는 운동

 

대기수라며 창대하게 출범했지만 학년이 올라가니 미약하게 두 명뿐이 남지 않았다. 새로 뽑을 신입을 제외하고 동아리 전 학년 인원이 5명뿐이 되지 않았다. 대회 우승 트로피를 진열장에 쌓아놓은 영광의 OB들께서는 "우리는 동기들이 너무 많아서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테스트해서 잘렸다"라고 우스갯소리 하신다. 미천한 중생들 앞에서 그렇게 무심히 '라때는 마리야'를 시전 하셨다.


바다에서 하는 운동이라, 한번 운동을 시작하면 시간이 많이 소비된다. 그래서 학업이 있는 평일 말고 주말에 운동을 한다. 한 명이라도 일이 생기면 운동에 차질이 발생했다. 적은 인원으로 운영하자니 운동장비 관리도 해야 하고, 운동도 해야 하고, 해상운동이라 항시 당직자가 배치되어 안전을 체크해야 해서 빠듯했다. 그러니 평일 학업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간을 거기에 투자해야 했다. 2학년이 되서 운동장비에 책임이 주어졌고, 공강 시간에는 시간을 할애하여 부서진 장비를 고쳐놓고, 주말 운동 때 써야 할 장비들을 준비해야 했다. 동아리라는 것이 책임감도 배우는 것도 있다지만 점점 취미생활이 의무가 되가고 있었다.


의무가 된다는 것은 나의 이상향을 따라 즐기는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한다는 피동적인 느낌이다. 내가 상상한 모습은 이게 아니었는데...  

미천했던 중생의 상상속의 운동

영광의 OB들은 가끔씩 YB들에게 찾아와 동기부여용 술도 사주시고, 안주빨 음식도 사주시면서 본인들의 영광의 나날들을 찬양해 주셨다. 자격지심이랄까? 라때의 영광을 유지시키기 위한 의무감이랄까? 4학년 선배들과 참가한 대회 시합에서 하나 남은 동기와 한배를 타며 한참 모자란 실력으로 비벼 대느라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해라, 이쪽으로 틀어라, 저기서 뱃머리를 돌려라, 돛모양 살펴라, 당겨라, 풀어라, 서로에게 고성을 높이고 있었다.


"야 배가 무거워지는 것 같은데?"

"어 뭐야, 진짜 가라앉고 있는 것 같은데? 뒤에 봐봐"

태풍예보 속, 흔들리는 배의 모난 부분에 팔꿈치를 찢겨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내가 지금도 사랑하는 유일한 동기녀석이 배 뒷부분을 살핀다.


"야야 드레인콕 안막고 나왔다"

"야이 빨리 육지로 배돌려! 들어가자"

돈 들여 멀리서 장비를 이동시켜 시합에 참가했고, 수업도 겨우겨우 공결 처리했다. 시합 전날 밤 숙소에서 더 시켜 먹을 돈이 없어 돌도 씹어먹을 아이들이 겨우 김치찌개에 공깃밥 하나로 버티면서 기다린 시합이다.(사실 좀 더 시킬 돈은 있었으나 밥을 더할래?, 소주를 더할래? 다수결에 소주표가 많았었다...)

그런 이유로 특기생들도 태풍예보에 포기한 시합에서 어떻게라도 버텨 보겠다고 나간 첫날 경기였다. 그런데 배에 구멍을 막지 않고 나왔다니... 책임감이 좌절감이 되는 순간이었다.

* 배의 공기탱크는 배를 물에 뜨게 해 주고, 뒤집어져도 가라앉지 않게 해 준다. 그 공기탱크를 막기 위한 마개가 있는데 '드레인 콕'라고 부른다.


OB가 되면서 또 막내가 됐고, 영광의 트로피 기수들은 사회에 나와서도 열정적으로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열등감에 휩싸여 있는 나를 불러 내기 일쑤였다.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똘똘 뭉쳐 YB생활을 보냈기 때문이랄까? 아니면 사회생활 24시간 중에 16시간을 일에 열중했기 때문일까?  이제 지긋지긋한 의무감과 책임감을 사회에 나와서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단톡방 알람을 살포시 죽여 놨다.


어쩌면 취미에 대한 그 의무감과 책임감은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배정받았는데 동네 학원 친한 녀석들이 같은 학교에 붙었다. 우리 같이 뭉치자는 녀석들의 끌림에 음악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풍물부에 어깨동무하고 덥석 들어갔다. 그래도 풍물부, 그러니까 사물놀이는 매우 매력적인 음악이었다.

"하늘 보고 별을 따고, 땅을 보고 농사짓고~ 덩덩 꿍따쿵 쿵따쿵따 쿵따쿵"

"올해도 풍년이요, 내년에도 풍년일세~  덩덩 꿍따쿵 쿵따쿵따 쿵따쿵"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대낮같이 밝은 달아~ 덩덩 꿍따쿵 쿵따쿵따 쿵따쿵"

"어둠 속에 불빛들이, 우리들을 비춰주네~~~~~~"


음악도 운동과 마찬가지로 기본기가 중요하다. 여라가지 장단들이 많았고, 숙지하고 합을 맞추기 위해서는 점심시간을 반납하여 집중 연습을 해야 했다. 지금 같아서는 말도 안 될 일이지만, 점심시간 연습을 위해 싸간 도시락은 무조건 쉬는 시간이나 수업시간에 까먹어야 했다.

'도시락을 까먹다'... 젊은 세대들은 아마 생소한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책상 밑에서 반찬을 밥통에 섞은 다음, 교과서를 보는 척 앞에 병풍처럼 쳐놓고, 펴놓은 책 중간에 밥통을 놓고, 선생님 시선을 피해 한 숟갈 두 숟갈씩 퍼먹는다. 가끔 걸려서 귀가 뜯길 정도로 들어 올려졌지만^^. 1학년 내내, 2학년 내내 그렇게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도시락을 까먹었다.


또 다른 책임감도 있었다. 이런 공연 동아리들의 가장 큰 행사는 바로 2학년 축제 때 공연이다. 과리를 맡고 있던 나는 앞에 나서길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쇠가 아닌 부쇠를 택했다.(상쇠는 사물놀이 전체를 이끌어가는 연주자 역할을 함). 물론 상쇠를 맡고 있는 친구 녀석보다는 실력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근데 그 상쇠 녀석이 축제 두 달을 앞두고 여자 친구 문제로 동아리를 탈퇴하겠다는 것 아닌가?...  

책임감 때문에 적성에 맞지도 않는 상쇠를 어거지로 연습하고, 북을 치던 녀석을 부쇠로 교육시키고, 무사히 축제를 마쳤다. 거기에 더해 여고 축제에 찬조공연까지 해냈다. 때문에 수능 모의고사 점수는 몇십 점이나 떨어졌다...

상쇠는 빨간색 조끼, 부쇠는 파란색 조끼

 

내가 진짜로 즐겨야 할 취미생활에서의 책임감 의무감... 왜 취미생활까지 이타적으로 살아야 했는가?...

 

이제 와서 무릎 꿇고 고합니다.

사물놀이고 요트고 싫습니다. 이제는 진짜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습니다...


나는 축구를 좋아한다. 직접 하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개' 발이다. 조기축구회 나가는 친구들을 동경한다. 조기축구회를 한번 나간 적이 있는데 배 나온 아저씨가 너는 다시는 나오지 말라고 했다. 상처를 많이 받았다. 남 피해주기 싫어 그 후로 그쪽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었다. 못해도 욕 들어먹을 나이가 아니다. 욕을 들어먹어도 한 귀로 흘려보낼 수 있는 무기까지 있다. 관절이 버텨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순간순간 순발력을 발휘해야 하는 근육이 버텨낼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연찮게 찾아온 이 백수의 여유에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 좋아하는 걸 해보고 싶다.


고등학교 반대항 축구대회에서 후보선수로 나간 적이 있었다. 몇 번의 시합 중 거의 10분 정도만 뛰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상대편 게슈타포의 빨랫줄 같은 중거리 골이 내 가슴에 아직도 찬란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상대편 담임 선생님은 독일어를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에 별명이 게슈타포였다. 학생들을 대표하여 그런 좋지 않은 별명을 붙여드린데 대해 사죄의 뜻을 전합니다).


동네 조기축구회 연락처를 검색한다.

이제는 내가 빨랫줄 같은 중거리 슛을 때려 볼 예정이다.

 




*이 글을 혹시 보게 되는 우리 풍물부, 요트부 선후배님들. 책임감이 싫다는 거지 사람들이 싫다는 게 아닙니다^^. 앞의 선배와 뒤의 후배와 옆의 동기 덕분에 즐겁게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선후배동기들 덕분에 버틸 수 있었던 취미생활





*딩기요트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딩기요트의 꽃인 470 종목에 대한 영상을 하나 공유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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