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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이 아빠 Oct 22. 2022

EP19. 내 마음의 고향, 을지로

백수의 전 직장

새벽 6시부터 울려대는 징한 핸드폰의 알람 소리는 5분만 더, 5분만 더, 간절한 연장 신청에 결국 맞춰 놓은 시간보다 20분 늦게 꺼지곤 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징하게 울려대는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하고 꿈나라에 빠져 계시는 중학생 딸에게 일어나라, 일어나라, 안타까움으로 흔들어대고 있다.


위아래 깔맞춤 할 정신도 없이 부랴부랴 아무 와이셔츠, 아무 바지를 대충 입고 뒤축이 구겨지지 않게 까치발로 구두를 질질 끌며 현관문을 염과 동시에, 나 다녀올게, 처절한 외침을 해대곤 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현관 앞에 세워둔 킥보드를 꺼내 들고, 아빠가 킥보드 가지고 먼저 내려가 있을 테니까 빨리 내려와 너네들 늦었어, 끔찍한 으름장을 초등학교 딸 유치원 딸에게 외치고 있다.

킥보드로 등교하는 녀석들


플랫폼에 길게 늘어선 줄에 한 명이라도 앞에 서려고 에스칼레이터 계단을 조바심으로 뛰어내리곤 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햇살이 쏟아지는 지하철 입구에서 여기저기 두리번두리번, 사람 많으면 한 차 보내고 다음 차 타지, 세월아 네월아 사뿐사뿐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올리고 있다.

항상 뛰어다니던 에스컬레이터


마지막 환승역인 당산에서 최종 종착역인 을지로 입구까지는 20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그 잠시라도 눈을 붙이기 위해서 킬리만자로의 하이에나처럼 앉을자리를 찾아 헤매곤 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밖이 보이는 전차의 문 옆에 기대어 당산역을 출발하면 아름답게 펼쳐질 한강의 은빛 물결을 기대하며 먹이를 노리는 표범처럼 바짝 웅크려 설레고 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인식되지 않는 사물들과 손목시계를 번갈아보며 바삐 뛰어가던 그 딱딱한 을지로 지하상가는 따스하고 구수한 정겨움으로 모락모락 피어나 지금은 곁에서 나를 포근하게 감싸준다.

을지로 지하상가


그렇게 나는 회사를 그만둔 지 10개월 만에 처음으로 을지로에 돌아왔다. 퇴사를 하며 전 직장이 위치한 을지로 쪽을 보고 오줌도 싸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정말 퇴사를 하고 나서 실제로 그 근처를 간 적이 없었던 것이다. 본사 사무실은 그리 크지 않아 많은 인원이 근무하는 건 아니지만 퇴사하고 그나마 연락하고 지내는 한두 명의 회사 동료가, 언제 한번 놀러 와라, 놀러 와라, 노래를 불렀지만 '나중에 놀러 갈게'하던 인사치레는 결국 하얀 거짓말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헌데, 평생 돌아보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을지로에 하루에 두 개의 약속이 잡혀 버렸다. 전 직장에서 나의 퇴사를 굉장히 안타깝게 생각하며 꼭 나중에 한잔하자고 했던 현장 소장님이, 본사 사무실에 교육을 받으러 올라온다고 그 전날 보자며 거절할 수 없는 약속을 툭 던지셨다. 그리고 얼마 전 전 직장 건너편 빌딩에 사무실을 개업한 고등학교 친구 녀석이 놀러 오라는 노래를, 개업 축하 화분으로 화답하며 겨우 때우고 있었지만, 그 소장님과 약속이 잡힌 김에 친구에게 졌던 '나중에 놀러 갈게'라는 그 찝찝한 빚도 한꺼번에 상환하자며 덜컥 을지로에서 두 개의 약속을 잡은 것이다.


아이들을 모두 등교시켜놓고 지하철에 올라 을지로로 향하는 길은 예상치 못한 편안함으로 다가왔다. 항상 조바심으로 다가왔던 그 출근길은 포근함으로 몸을 감싸 왔다. 물론 출근시간대가 막 지난 시간이었지만 그건 지하철 칸의 넉넉한 공간이 주는 여유가 아니었다. 다 큰 성인이 돼서 돌아온 고향에서 느껴지는 정겨움 같은 것이었다. 그 지긋지긋했던 을지로가 이렇게 평화로운 동네였나? 위로 올려다보는 하늘을 답답하게 가리던 고층빌딩들은 가을 하늘의 높은 푸르름을 가득 담아 더욱 찬란하게 우뚝 솓아 빛나고 있었다.


출근길에 자주 마주치는 황동의 송수구를 폴리싱 약품으로 세월아 네월아 닦고 계시던 관리실 아저씨는 바쁜 걸음을 하고 있는 나에게는 항상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여유로운 발걸음을 하고 있는 나는 그 황금색으로 광택이 나고 있는 송수구를 쓰윽 문질러 보며 이제는 내 마음에도 광택이 나고 있음에 감사해했다. 그 징글징글했던 을지로가 결국 내 마음에 고향이었다는 걸 깨닫고 있는 것이었다.


아직도 그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어렸을 때 살던 고향에 갔을 때 왠지 모를 어깨의 으쓱거림이 있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제 막 한 건 개시했다며 활짝 웃으며 반겨주는 친구 녀석의 사무실에 들어서는데 왠지 모르게 어깨가 으쓱거렸다. 그 어깨 들썩거리며 사무실 구석구석 따져보고 재보고 잔소리 몇 개 해줬더니 벌써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무실 인파가 쏟아져 나오기 전에 나서자며 친구를 재촉했다.


"야, 이 주위에 맛집 어디 있냐?"

"하, 아직 그것도 파악 안했냐? 빨리 따라와, 사람들 줄 서기 전에 들어가게."

아직 버릇 고치지 못한 빠른 걸음에 차이가 벌어져가는 친구를, 따라오던지 말던지 저 뒤에 놓고 어깨 으쓱거리며 유명한 굴짬뽕 집으로 들어갔다. 일반 빨간 짬뽕과는 다르게 맑은 국물에 푸른 배추 입과 굴이 잘 어우러진 굴짬뽕은 면발에 풍미를 한껏 치켜세운다. 친구 녀석도 후루룩 거리며 역시 한때 을지로 전문가답게 맛집을 정확히 데리고 와줬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높게 치솟았던 어깨뽕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더 높게 치솟은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친구에게 엄지척 받은 굴짬뽕


아직은 손님이 들락거리지 않는 사무실에 앉아 개업하며 고생한 이야기, 그동안 공부했던 이야기, 법인에서 근무했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세 시간이 훌쩍 흘러 벌써 두 번째 약속시간이 임박했다. 백수생활 청산하기 전에 꼭 한번 더 놀러 오라며 아쉬워하는 친구를 뒤로 하고 일어섰다.

'짜식, 다음번에도 맛집 데리고 가 줄게'

여러 개의 맛집들을 이야기해줬지만 그 녀석이 다 기억할리 없을 거라 훗날 맛집 탐방을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엘리베이터에 들어서 로비층 버튼을 눌렀다.


두 번째 약속은 을지로 옆동네인 종로였다. 저녁식사 전에 조선시대 왕들의 사당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자며 종묘에서 보자고 현장소장님께 그 뜻을 전하고 종로3가역 11번 출구에서 만나자고 했었다. 종로나 을지로나 행정구역상으로 나눠져 있을 뿐 종로도 고향 느낌이 물씬 나기는 마찬가지다. 현장 직원들에게 수시로 수여하던 근속 기념 금 명함, 금열쇠를 제작하기 위해 종로 귀금속 거리를 종종 다녔고, 근무시간에 잠시 여유를 가지고 싶어 완성품은 배달을 시켜도 되지만 회사가 가깝다며 일부러 걸어 그곳에 가며 농땡이를 치곤 했다. 때문에 종로에서도 어깨가 으쓱거린다. 더군다나 그 농땡이의 최고점에는 몰래 업무시간에 혼자 관람했던 오늘의 약속 장소인 종묘도 포함되어있어 어깨가 하늘로 치솟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현장소장님과 만나 종묘를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다. 자유롭게 드나들던 종묘는 지정된 관람시간에만 들어가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고 꼭 해설사와 같이 다녀야 하기 때문에, 소장님과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의 수다로 해설사의 그 재미 넘치고 역사 넘치는 이야기를 대신하기에는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눈으로 스윽 보고 다니던 종묘는 해설사의 친절한 설명 덕분에 거대한 경건함으로 다가왔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치부했던 우리나라의 소중한 국가 보물 앞에서 사죄의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기도 했다.

종묘의 영년전과 신로(신로의 오른쪽은 어로, 왼쪽은 세자로), 정전은 보수공사 중


소장님도 덕분에 뜻깊은 종묘를 돌아볼 수 있었다며 툭툭 내 어깨를 추켜세워 주었다. 그 추앙(?)에 힘입어 저녁식사 장소는 요즘 세계적인 핫플레이스인 광장시장으로 콕 집어 소장님을 이끌었다. 아직 퇴근시간 전이지만 역시 광장시장 먹거리 골목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소장님께 이곳저곳 설명해드렸더니 아이고, 아이고, 이런 곳을 다와 본다며 연신 고마움을 표현해 주신다. 치아를 치료 중이라고 하셔서 광장시장 명물인 육회 탕탕이는 아쉽게 재쳐두고, 그에 상응하는 명물인 전집으로 소장님을 모셨다. 모둠전은 기름기 좔좔 흘리며 알싸하게 쏘는 막걸리와 기가 막히게 어우러졌으며, 특히 육전은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고향의 육즙을 가득 담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전집에서 소장님과 나도 왁자지껄하게 묻혀가고 있었다.

광장시장 모둠전 그리고 막걸리


회사를 그만두고 거의 일 년이 다돼가기 때문에 직장인의 짠물 단물이 다 빠질 법 도한데, 발그레해진 둘은 직장 회식의 당연한 수순인 2차가 당연하다는 듯 서로 의견 물을 것도 없이 다음 장소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2021년 아직 코로나가 만연했던 당시 종로 피아노 거리는 퇴근시간에도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소장님과 당도한 2022년 말 종로 피아노거리는 오랜만에 가슴이 쿵쿵거릴 정도로 활기찬 취객들이 가득 차 있었다. 포장마차에 들어선 우리들은 만석인 가운데 한 팀이 일어나서 겨우 앉을 수 있었고, 술에 취하는지, 분위기에 취하는지, 회사 험담에 취하는지, 그 감도 잃은 채 술잔을 부딪히고 또 부딪혔다. 그렇게 고향은 향긋한 술냄새로 번지고 있었던 것이다.


얼큰하게 취한 소장님을 숙소 앞까지 모셔다 드리고, 오늘 정말 즐거웠다, 종종 소식 전해라, 술 취한 이들 특유의 끝을 모를 인사를 겨우 끝낸 뒤 뒤돌아서 들어가는 모습까지 확인을 하고 나도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켜져 있는 사무실 불빛으로 고즈넉하게 발걸음을 비춰주는 빌딩 숲 사이를 비틀비틀 걸었다. 업무에 쩌들어, 술에 쩌들어, 피곤함에 쩌들어 터벅터벅 걷던 그 길이 이렇게 정겨운 곳으로 느껴진다니... 가던 걸음 멈추고 보도블록에 털썩 앉아 그 느낌이 떠나지 못하게 잠시 지연시켰다. 압박감으로 다가왔던 그 퇴근길이 이제는 가지 말라며 포근함으로 잠시 나를 잡아둔다. 새로운 곳에서 시작할 나의 새로운 삶을 새초롬하게 질투하듯...


도망가고만 싶었던 을지로, 그곳은 내 마음에 고향이 되어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넘어 을지로로 한번 가보실래요? 그럼 영상을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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