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미안하다는 말은 별로 안 해 본 것 같다. 누군가의 발을 실수로 밟았다던가 할 때 하는 미안해 말고 업무상 죄송합니다 말고 진심으로 내 마음을 밝히고 하는 사과 말이다. 대단히 잘난 삶을 살아와서 그런 건 아니고 부모님과의 관계는 주로 혼내면 혼났고 밥 먹으라면 밥 먹으면서 풀어졌던 것 같고 자매와의 다툼도 그랬지 싶다. 친구들과는 그럭저럭 사이좋게 지내며 크게 싸울 일이란 게 없었.. 나? 잘 모르겠다. 없지야 않았겠지만 말이다.
사랑해라는 그 말은 그보다 더 심하다. 나는 성인이 되고 한참 후까지도 소리내어 사랑한다라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드라마에서 그런 말이 나오면 어떻게 저런 말을 소리내서 하지? 하는 생각도 했다. 남편하고 연애하면서도 그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글자로는 써봤다. 글자로만.
이런 내가 아이를 낳고 키우며 제일 많이 하는 말 중에 사랑해가 있다. 저절로 나온다. 물론 앓는 소리가 먼저 나와야 한다. 아이고 이뻐라. 아이고 귀여워 어머나 누구 딸이야 아이고 너무 사랑해. 담백하게 전할 수 없는 고백이라 끙끙 앓는 소리를 하며 머리카락도 마구 쓰다듬고 볼도 자꾸 만지고 뽀뽀도 하고 손가락 발가락도 주물러 주며 짜내듯 외친다. 아이고 이뻐 엄마가 너무 사랑해!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도 잘 나왔다. 어디 매체에서, 부모가 상황을 받아들이고 사과도 하고 그래야 아이들도 자기 잘못을 잘 인정하고 사과한다는 걸 보고 나서부터였는데 살면서 자주 해 본 말이 아니었지만 어렵지 않게 잘 할 수 있었다. 아이쿠 죽이 너무 뜨거워떠여? 엄마가 미안해~ 아 엄마를 여러 번 불렀었어? 엄마가 잘 못 들었지 미아내~ 그런 뜻이 아니었어? 엄마가 잘못 이해했네 미아네~(일부러 적은 오타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태까지 안 했을 뿐, 실로 감정표현을 잘 하는 엄마인 줄 알았지?
문제는 아이들은 점점 자란다는 데 있었다. 아이들 유아 시절엔 하기 쉬웠던 바르고 옳은 체 하는 모습이 점점 힘들어진다는 데 있었다. 본성이 그렇지 않았기에 내가 바담 풍 해도 너는 바람 풍 하여라 하는 날이 생겨났다. 아이들이 그걸 지적하면 대답이 궁색해 질 때가 있었다. 또 아이를 꾸중하다 보면 나도 잘못한 부분이 있어 상황이 정리된 후에 대화를 하면서 '엄마가 이러이러한 건 잘못했어 근데 너도 말이야..' 라고 말하는 날이 늘어났다. 아, 이거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건데.
사과를 받는 입장에선 사과만 받고 싶지 나도 잘못했지만 너도 좀 그렇잖아? 라는 말이 듣고 싶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피차 잘못한 상황이라면 본인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걸 알테니 나도 미안했어 라고 할 테고 말이다.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애써 생각하고 싶지 않다.)
오늘 오전에 열 살 난 아이를 꾸중할 일이 있었는데 몇 십년을 더 살아 말빨이 훨씬 좋은 내가 십 년 밖에 안 산 애를 궁지로 몰아 넣듯 마구 쏘아대 눈물을 쏙 빼게 했다. 문제는, 도중에 이건 아닌데 이 정도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나중에는 아이에게 사과를 해야 겠구나. 생각했고 시간이 좀 흐른 뒤 어느새 잊은 듯(안 잊었겠지만) 헤실거리는 아이에게 다가가 엄마가 아까 너무 무섭게 소리치고 다그쳤지? 하고 물으니 응! 하고 대답했다. 그래 엄마가 좀 더 다정하게 말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라고 말했다. 말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런데 말이야.. 하는 말이 나올 뻔 했다. 그런데 말이야 너도 좀 이러저러하게 해 주면 좋겠어 따위의 말 말이다. 오우.. 급히 입을 다물고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엄마가 미안해. 한 번 더 말하고 말이다.
저도 죄송해요. 라고 아이가 안긴 채 대답했다. (202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