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없던 십 대 때 불행했던 이유- 2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았다
고3 초, 날씨가 아직 쌀쌀한 이른 봄이었다.
나는 구미 S전자에 합격했다. 말이 대기업이지 3교대 공장 생산직이었다. 주변에선 S전자 취직 소식에 모두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넸고 한편으론 부러운 시선마저 보내왔다.
하지만 왠지 부모님만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으셨다.
취업 가기 전날 마지막 저녁 식사 자리, 아버지는 밥을 드시며 반주를 한 잔 하셨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곁눈질로 훔쳐보니 어느새 아버지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으셨다.
"공부에 관심도 없고 가지 않아야 할 아이는 대학교 가서 졸업도 못하고, 진짜 가서 공부해야 될 아이는 돈이 없어 대학교도 한번 못 가보는구나. 아빠가 미안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물을 목격했다. 이유 모를 뜨거운 눈물이 내 볼을 타고 흘렀고, 아무 말 없이 온 가족이 흐느꼈다. 그날 저녁 우린 아무도 밥을 먹지 못했다.
가족들의 눈물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취업 당일의 무심한 아침은 밝았다. 아버지 차를 타고 엄마와 셋이 구미로 향했다. 도착지 근처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엔 온통 공장들이 늘어서 있었고,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굴뚝밖에 내 눈을 사로잡는 건 없었다.
어렸던 내게 그 장면들은 어느 흑백 사진 속 정지화면처럼 잿빛 기억으로 텁텁하게 남아있다. 처음 보는 삭막한 풍경은 취업을 취소하고 부모님을 따라가고 싶은 내 마음을 꼬드겼다. 하지만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을 수밖에,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티가 났겠지만 열심히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하고 무사히 부모님을 배웅했다. 덩그러니 회사 앞에 혼자 남은 나는 천근만근이 된 발걸음을 쉽게 회사 안으로 옮기지 못해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낯선 도시의 냄새와 차가운 공기, 압도하는 공단의 모습은 열아홉 어린아이를 불안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내가 배정된 부서는 하드디스크 서비스 부서로, 휴무는 겨우 한 달에 한번 1박 2일이 다 였다. 어떤 날은 9시간 3교대, 또 어떤 날은 12시간 2교대를 돌며 내내 서서 일을 했다. 기계가 HDD를 반 조립하여 내놓으면, 다음 HDD가 나오기 전까지 나는 전동 기계와 한 몸이 되어 빠르게 조립해야만 작업의 흐름을 맞출 수 있었다.
그렇게 꿈 없이 돈 만을 좇던 내겐 예견된 슬럼프가 금방 찾아왔다. 매일 반복되는 노동은 눈을 감고도 할 정도로 익숙해졌고, 어느새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반복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한순간 바보가 되어가는 나를 발견하곤 사색하길 좋아하며 즐겼던 나는 머리를 쓰며 하는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알람이 울리면 출근하고, 일을 마치면 몇 걸음 되지 않는 기숙사에 퇴근하길 반복했다. 그래서일까, 공장 회색 담벼락은 내겐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감옥의 창살 같은 존재로 느껴졌다.
1년 6개월 정도 일을 하고 나니 목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쉬는 날 없이 긴 시간 동안 목을 쓴 것이 원인이 되어 목디스크 시초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이름 있는 좋은 회사이므로 아파도 쉽게 그만둘 결정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참다 참다 단 1분도 고개를 숙여 일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너무 아프고 서러운 마음에 방진복 안 마스크가 다 젖도록 며칠을 울며 버텼다.
그렇게 미련하게 버티다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할 몸 상태가 되었고, 나는 그렇게 강제적 이유로 퇴사를 했다. 그 후 2년 정도 디스크 전문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해야만 했으며, 그 기간 동안엔 어떤 경제적 활동도 하지 못한 채 건강 회복에만 집중해야 했다.
뭘 잘 모르는 사람들은 S전자가 대기업이니 돈을 많이 준다고 그저 부러워했다. 물론 적은 돈을 주는 곳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내가 한 노동 이상의 값을 주는 곳은 없었다.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돈의 크기는 곧 노동의 크기와 비례했다.
고3이었던 나는 일을 하느라 수능시험과 졸업식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19살이 할 수 있는 많은 것을 포기해가며 못 놀고, 안 쓰고 돈을 모았던 기억밖엔 열아홉 꽃몽우리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라곤 별 다른 게 남았을 리 만무했다. 그저 잿빛 기억들이 가득할 뿐.
아이러니하게도 건강과 맞바꾼 돈으로 다시 건강을 찾아야 했고, 돈을 벌기 위해 건강을 잃은 나는 이른 나이에 돈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다. 나는 아직도 그때의 후유증으로 목을 오래 쓰지 못한다.
얼마 전 한 작가님의 '가난은 냄새를 풍긴다'는 글을 읽고, 나는 문득 공장 굴뚝의 연기 냄새가 떠올랐다.
가난이 나를 꿈꿀 수 없게 했던 것인지..
꿈이 없던 내가 가난을 이용한 것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아직도 그 계절의 차가운 공기 냄새를 맡으면,
그날의 공단 풍경과 굴뚝의 뿌연 연기가 생각나곤 한다.
내가 '꿈'을 가졌었다면 10대의 나는 좀 더 행복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