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낸 여섯 번째 손가락, 그리고 여전한 환상통- 1
사실 그녀가 함께 있을 땐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못돼 먹은 생각을 할 정도로 그녀를 증오했었다. 그런데 얼어 죽을 그놈의 핏줄이 무서운 건지, 아니면 지긋지긋한 그 미운 정이 무서운 건지 꼴도 보기 싫던 그녀가 사라지자 오직 살아서만 돌아오게 해 달라는 기도를 매일 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오 학년쯤, 그 어린 나이에도 내 행동과 말을 되돌아보곤 후회와 반성을 무척 했었다. 나가서 다신 들어오지 말라던 증오 섞인 내 말이 현실이 된 것 같아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돌아온 날, 나는 그녀를 안고
"언니 잘 왔어. 고마워."
라는 말만 하고 소리 내 한참을 엉엉 울었다.
그 순간 주변에 그 많던 구경꾼들은 마치 먼지가 된 것 같았다.
그 순간엔 오직 나와 그녀만이 존재했다.
그녀가 사라진 뒤 나는 매일 기도하며 살았다. 종교도 없던 내가 들어주는 대상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기도를 매일 수시로 했던 것이다. 살아만 돌아온다면 그저 그녀가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무엇이든 하겠다던 내 형태 없는 약속을 그날부터 나는 스스로 실천하기 시작했다. 누구도 알지 못하겠지만 왠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언니가 다시 사라질 것만 같았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여전히 아웃사이더처럼 가족들과 사람들에게서 겉돌았다. 나는 어떤 감사함과 책임감에 묶여 그런 그녀를 사회 부적응자에서 평범한 한 사람으로 되돌려 놓고 싶었다.
진심은 진심을 알아본다더니 그녀는 조금씩 나에게만은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날부터 그녀는 자기의 가장 최근부터 집을 나가던 날까지의 이야기를 여러 날에 걸쳐 조금씩 들려주었다. 그녀의 최근은 처참했고 과거로 돌아가도 처참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초등학교 때부터 오랫동안 심한 왕따를 당했고, 집으로 돌아오면 동네 오빠들이 성추행을 했다. 그 사실을 엄마에게만 털어놓았지만 엄마에게선 행동을 잘하라는 소리만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보호받지 못했다. 어디든 출구를 찾아야 했을 것이다. 그녀도 살기 위해 감행한 일탈과 가출이었던 것이다. 너무 어렸던 그녀에게 방황의 이유는 충분했고 나는 그녀가 너무도 가여웠다. 그래서 더욱 그녀의 친구가, 또 엄마가 되어주고 싶었다.
성인이 된 그녀는 여전히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느꼈고, 고등학교마저 자퇴한 학력으론 아르바이트조차도 쉽게 구하기 힘들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설득했다.
"언니 이러다간 평생 일 구하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나중에 자식을 놓으면 기초 교육과정인 고등학교도 졸업 못 한 것을 스스로 두고두고 후회할 거야. 내가 도와줄게 검정고시로 졸업장 따자."
나는 언니와 함께 다니며 필요한 책과 문제집을 사주고 공부도 도와주었다. 다행히 똑똑했던 언니는 조금 도움을 주니 검정고시에 쉽게 합격했고, 일은 조금 더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즈음 언니는 나의 전셋집에서 살고 있었고 가끔 모자란 생활비를 빌려주거나 카드빚을 갚아주기도 했다.
그러던 사이 그녀는 아이가 생겼고, 부모님의 은근한 반대에도 아이를 핑계로 급하게 결혼을 했다. 나와는 거리상으로 꽤 먼 곳에 신랑을 따라 정착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은 그녀에겐 딱 맞는 말이었다. 언니의 전화는 온통 힘들다, 우울하다는 소리가 대부분이었다. 평소 충동적이어서 돈 씀씀이가 크고, 비교적 자기중심적이던 그녀의 성격 탓에 결혼 생활조차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일까 형부와의 불화는 끊이질 않았다.
세상 처음인 예쁜 조카와 애를 낳고 부모가 됐음에도 내겐 늘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은 언니가 걱정되어 몇 주에 한 번씩은 그녀를 찾아갔다. 차가 없었던 나는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마지막으로 택시를 타야 그녀의 집에 겨우 도착했다. 갈 때마다 족히 다섯 시간은 넘게 걸리던 그 길.
힘겨웠던 결혼생활을 내가 가고, 그녀가 나에게 오는 시간들로 그녀는 버텼다고 했다.
그러다 큰 사건이 있었다.
그녀의 말을 빌리면 아직 너무나도 어린 자식들 둘을 앞에 두고 개처럼 맞았다고 했다. 그 계기로 그녀는 두 아이를 모두 대려 오고 양육비를 받지 않는 조건으로 별거 후 몇 년 만에 이혼을 할 수 있었다.
아이 둘을 홀로 키우며 힘들고 어려운 생활을 하는 그녀는 가족들에게 평생 풀지 못하는 숙제같이 느껴졌다. 그녀는 혼자가 된 후 두 아이를 책임지고 부양해야 하는 입장에서도 여전히 금전적으로 여러 번 도움을 받거나 걱정을 시켰고 마흔이 다되어서도 변하지 않는 그녀가 나로선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게 온 가족이 알도록 여러 번의 금전적 문제를 들키고 두 아이를 부양하면서 여전히 돈 십만 원이 없어서 손을 내미는 그녀에게 나는 큰 회의감을 느꼈다.
"언니 나도 신랑이랑 금전적으로 오픈되어 있어서 이젠 더 이상 빌려줄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몇십 년 만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평소에도 도움이 필요할 때나 연락이 왔지만 그 후로 그녀는 연락이 오지 않는다.
역시나 이젠 내가 필요 없어진 걸까?
최근 들어
"누나가 도움을 주려고 했겠지만, 그런 행동들이 오히려 큰누나에겐 독이란 거 알지?"
라고 했던 동생의 말이 다시금 내 심장을 할퀴고 괴롭힌다.
"그래 내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더 빨리 자립했을 수도 있었겠지... "
사실 그때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말을 듣고 화나고, 서운하고, 서러웠던 건 모두 나를 향한 감정이었단 걸,
알면서 인정하기 싫었고, 그 말에 굴복하기 싫었다.
그녀를 내가 구제해주겠다는, 아니 구제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 그녀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결국 나는 그녀를 내려놓으면서 동생의 말에 굴복했다.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나는 안 그런 척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부모님을 원망했고, 언니를 원망했다. 아닌 척, 나 조차도 의식적으로 속여 왔다.
아마 의식은 속일 수 있었을지 몰라도 깊은 무의식까지 속이는 치밀함은 나와 거리가 멀었으리라.
최근 동생의 말에 굴복하며 이제야 나의 어리석음을 반성한다. 그 누구도 나에게 그렇게 헌신하며 살라고 등 떠민 사람은 없었다. 모든 결정은 스스로 했고, 분명 매 순간의 결정마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 편하지 못할 나를 위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내가 부모님과 그녀에게 서운했던 감정이 들었던 건 내가 했던 행동들에 조금이라도 어떤 대가를 바랐기 때문이 아닐까?
이 어리석음의 끝에 얻은 교훈을 발판 삼아 조금은 넓고 단단해진 마음으로
세상을 좀 더 넓고 깊게 통찰할 수 있길 바라본다.
"그래 동생아 나는 그녀에게 '약'이 되고 싶었어.
하지만 나는 그저 '독'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