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야 그때 내가 밥은 해 줬어? 빨래는 하고, 청소는 했어?"
분명 그 정신에도 모든 걸 해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의 내 기억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첫 출산 때였다.
열다섯 시간의 고통스러운 진통에도 자궁문이 삼 센티에서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차분한 호흡은 힘들어졌고 배가 유난히 작던 나는 자궁의 공간을 확보해 주지 못한다는 느낌에 불안함이 엄습했다.
그때였다.
뱃속의 아이가 물 밖을 나온 물고기처럼 파닥거렸다. 아이가 숨을 쉬지 못한다는 걸 엄마인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설픈 판단을 하기도 잠시, 태아의 안정된 맥박을 들려주던 기계가 갑자기 고장이난 듯 시끄러워졌다.
"삐빅 삐빅- 삐빅 삐빅-"
점점 소리는 더 요란해졌다. 불안해진 신랑은 간호사를 불렀고 태아의 맥박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당장이라도 수술을 해달라고 애원했고 담당 의사 선생님과 상의하에 응급수술을 진행했다.
차가운 수술대, 온통 회색으로 꾸며진 수술실, 나를 비추는 대형 조명들.
반신 마취로 정신이 말짱히 깨어있던 나는 그 스산하고 공포스러운 수술실의 모습이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마취약을 투여하고 한번 만에 마취가 되지 않자 추가로 마취약을 투여했고 그제야 수술이 진행되었다.
하반신의 느낌은 없었지만 내 몸뚱이가 덜컹거리고 있음이 느껴졌고 수술실 스태프들의 대화 소리와 웃음소리가 묘하게 거슬렸다. 모두들 수술실 밖의 얘기로 웃고 떠드는 동안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 건 나 하나뿐이었다. 한 공간에 존재하면서도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듯, 극과 극의 감정들의 실체를 마주한 순간 나는 이 세상에 오롯이 혼자였다.
나의 걱정과는 달리 아이는 예상보다 빨리 내 몸 밖으로 안전하게 나왔다. 아이가 안전한 것을 확인하자 안도와 기쁨의 눈물이 뜨겁게 내 뺨에 흘러내렸다. 그 순간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저기.. 선생님 저 숨을 못 쉬겠어요. 죽을 것 같아요."
내가 먼저 느끼고 한 발 늦은 기계 소리가 불안정한 소리를 울려댔다.
"삐빅 삐빅- 삐빅 삐빅-"
태아에이어 나의 맥박도 널을 뛰었다. 숨쉬기 힘든 고통 속에서 순간 아이로 인해 먼저 들었던 기계 소리까지 겹쳐지면서 나는 극도의 불안함과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얼마나 지난 것일까. 깨어보니 나는 입원 대기실에서 회복 중이었다. 신랑은 갖 태어난 예쁜 아가를 안고 웃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모든 것이 안전하게 끝났구나라며 안도의 숨을 내 쉴 수 있었다.
어여쁜 아가를 얻고 기쁨과 행복감에 젖어 있으면서도 문득문득 전날 겪은 공포심들의 잔여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계획대로 얻어진 행복한 결실임에 흐트러진 모든 것이 금방 제자리를 찾아가리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오산은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문제는 하루 뒤인 다음 날 밤이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심장이 쿵하고 내려 않았다. 동시에 수술 때 느꼈던 호흡곤란 증상이 일란성쌍둥이처럼 찾아왔고 불안과 공포는 세트로 함께 왔다. 바로 옆에 친정엄마가 계셨었지만 내가 엄마에게 기대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심한 공황장애로 속은 비고 껍데기만 남은 듯한 엄마는 텅 빈 눈동자를 하고서 자주 초점을 잃었다. 그런 엄마는 오히려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공포심에 질린 내가 기댈 곳이라곤 오직 담당 의사밖엔 없었다. 급히 의사 선생님을 불렀고 전날 겪은 일들과 현재 겪고 있는 증상들을 설명했다. 의사는 혈압을 체크하고, 수술 부위 등을 살폈다.
"혈압이 낮지만 문제 될 정도는 아니고, 수술부위도 이상이 없습니다. 더 이상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마음을 편안히 가지도록 하고 안정을 취해보세요."
의사는 차갑도록 형식적인 말만 남기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절망적이었다. 형태를 알 수 없는 무엇이 나를 쫓았고 그것은 참을 수 없이 무서웠다. 의사의 말을 들은 후 나는 스스로를 탓하기 시작했다. 다들 순산하고 잘만 해쳐가는 길을 나약한 나만 헤매고 잃은 느낌이었다.
그날 담당 의사가 내게 산후 우울증을 의심이라도 하고 조언해 주었다면, 조금의 도움이라도 줬었다면 나는 조금덜 아플 수 있었을까?
그 뒤로 증상은 나날이 심해졌다. 산후 조리원으로 옮겨 수유를 할 때도 집중을 할 수 없었고 시도 때도 없이 불안에 시달렸으며 폐쇄된 공간이 숨이 막혀 호흡곤란을 느끼기도 했다.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긴 시간, 나는 마음을 꼬집어 상처를 남기며 견뎠다.
퇴원 후 아이와 단 둘이 된 시간엔 증상이 더욱 폭발했다. 아이에게 분유를 주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기본적인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아이 옆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아이를 따라 잠들고 무서운 시간들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자고 싶어도 잘 수 없는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초저녁 퇴근한 신랑이 옆에 있는 세 시간가량만 겨우 잠을 잤고 신랑이 떠날 다음날 아침을 두려워하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스스로 챙겨야 하는 끼니는 챙겨 먹을 생각조차 못했고 억지로라도 먹은 한 끼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고 모래알을 씹어 넘기 듯 역겹게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죽어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무서웠다. 아이를 멍하게 바라보는 나, 자려고 해도 잘 수 없는 기나긴 날들, 맛이 느껴지지 않는 모래 같던 밥알, 1분이 한 시간 같던 시간, 신랑이 오기까지의 몇 년 같은 시간..
그런 텅 빈 날들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이의 50일 촬영 날이 되었다. 오랜만의 바깥나들이임에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고 오히려 두려웠다. 촬영장으로 향하던 차 안이 숨 막히게 느껴졌고 좁은 차 안과 달리는 차의 속도마저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무엇인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분명 막다른 골목을 앞에 두고 서 있었다.
"혼자 죽으면 아이와 신랑이 너무 불쌍하잖아.
다 같이 차사고로 죽었으면 좋겠어. 바로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