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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경 Aug 22. 2023

엄마가 ‘황혼 육아’ 거절한 신박한 방법

그 효과는 뛰어났다..!

언젠가 엄마는 나에게 성우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말한 적 있다. 그래서인지 엄마가 몇 년 전 자신의 팟캐스트를 운영한다고 할 때,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엄마는 팟캐스트를 만들면서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고, 나도 하기 어려워하는 편집 등 새로운 기술을 익혀갔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대단한 열정이라 생각했다.


그 방송은 꽤 오래 유지되고 있어서, 방송사에서 '시니어 콘텐츠 제작자'와 같은 타이틀을 달고 몇 번 인터뷰를 당하기도(?) 한 모양이었다.




어느 날 엄마는 한 방송사에서 '시민 제작자'로서 진행한 인터뷰라며 한 영상을 보냈다. 그때 나는 임신 준비 중이었다.  


방송 내용은 '황혼 육아'에 대한 것이었다. 진행자는 요즘 황혼 육아를 하는 시니어들이 많다며, 황혼 육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황혼육아에 대한 생각을 밝히는 인터뷰이(interviewee)로 방송에 출연한 것이었다.


주제를 듣자마자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매우 단호하게 황혼 육아를 하고 싶지 않다고 인터뷰했다.


방송 내용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보면, 엄마는 60대와 70대의 시간을 이야기하면서 '이제야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게 됐는데, 그 시간을 또 자식을 위한 시간으로 보내기는 힘들다'라고 말했다. 자녀가 특정한 사유가 있어서 도움을 청하거나, 주말에 가끔 손자/손녀를 돌봐줄 수는 있겠지만, 회사 가는 딸을 위해 '전담으로' 황혼육아를 할 수는 없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나 역시 육아휴직이 가능한 회사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최대한 육아휴직을 쓰고, 복직할 때는 어린이집에 맡길 계획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엄마에게 '황혼 육아'를 부탁할 마음도 없었지만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뒤집기 중.




물론 엄마의 입장에서는 아주 당연한 이야기였다. 내 입장에서도 애초에 엄마에게 맡길 생각도 없었으니 서운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굳이 방송에 나가서 선언하고, 또 굳이 그 방송분을 나에게 보내줬다는 점에서 '그래, 당연한 이야기지'라는 깔끔한 감정만 생기진 않았다.


'내가 엄마라면 이런 식으로 거절을 표현하지 않았을 텐데. 차라리 나에게 직접 솔직하게 말했으면.' 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엄마는 예민한 문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정돈된 형태로 말하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이런 류의 생각은 우리 집 특유의 정서라는 점을 상기했다. '나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테니, 너도 도움을 요청하지 말라'는 심리 말이다. 그리고 엄마는 이런 기조(?)를 나에게 자주 말하고 싶어 했다. 그렇기에 앞으로 다가올 육아라는 문제에 대해 미리 선을 긋고 싶어했던 걸 수도 있다.


여하튼 이러한 기조는 내가 어렸을 적부터 강조 돼왔고, 그 덕분에 나는 일종의 '독립심 강한 아이'로 자랐다. 엄마 역시 독립심이 강한 여성이었다. 우리는 서로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은 도움 정도만 주고받고, '자신의 일은 스스로 처리하는' 가족 구성원으로 살아왔다.  




사실 성인이 되어서 이런 기조가 일종의 '회피형 애정'이라고 정의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건강한 애정은 서로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것에 인색하지 않는다고 한다. 반면 회피형의 애정은 서로 도움을 주지도, 받지도 말자는 생각이 주를 이룬다. 언제나 '거리'를 두는 애정 형태라는 설명이다.


심리학적으로 이렇게 분류되는 애정이라고 해도, 어쨌든 우리 가족은 이런 애정 방식에 나름 익숙했다. 이것이 나름의 애정표현(가족 구성원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게 자신의 인생을 열심히 산다)인 것을 이해하기에 가족 관계에서 큰 문제는 없었다.


미디어에서 자식의 이름으로 빚을 지거나 자식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부모의 모습도 많이 접했기에, '회피형 애정'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완벽한 애정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할까.


물론 가족들의 나이가 점점 많아지고 건강과 육아 문제 등 이제는 서로에게 부담이 갈 만한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들이 많아지니 아쉬움은 있다. '조금 더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자고 말해도 괜찮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내가 먼저 도움을 주겠다고, 혹은 도움이 필요한 것이 없냐고 먼저 물어보려 노력한다.




결과적으로 엄마가 방송에서 한 '황혼 육아 거부 선언'으로 인해 나는  더 독립적인(?) 육아를 하게 됐고, 더 빠르게 육아에 적응한 것 같기도 하다.  


기저귀 갈이대에서.


육아와 관련한 도움을 요청하고 싶을 때, 엄마의 녹음된 단호한 목소리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래, 30대인 나도 힘든 것을, 70대의 노인이 된 엄마에게 어떻게 떠맡기리오'라고 생각한다.


육아에 대해 내가 조금 더 공부하고 조금 더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전환한다. 기본적으로 육아는 남편과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고 보니, 엄마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엄마 이야기를 주절주절 써대서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우리 엄마는 인터넷을 자주 하는 편이다. 내가 쓴 기사들도 다 검색해서 읽었던 전력이 있다. 언젠가 이 글을 엄마가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때는 엄마가 조금 당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 역시 할 말이 있다. 나 역시 먼저 엄마가 보내온 '황혼 육아 거부 선언' 방송을 듣고 서운함과 당황함을 느꼈다. 그러니 엄마도 이 글을 읽고 당황했더라도 나를 용서해 주리라 믿는다.


더 나아가 내가 엄마를 이해한 것처럼, 엄마도 날 이해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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