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계단에서 쟁반 엎을 것 같고 막 컵 다 깨뜨릴 것 같고 막
카페에서 음료가 가득 든 쟁반을 들고 계단을 올라갈 때. 계단을 올라가는 내내 나는 쟁반을 떨어뜨려 모든 컵이 와장창 깨지는 상상을 한다. 그러면 나는 어떤 식으로 변상을 하고, 어떤 식으로 도움을 요청해 뒷수습을 할지까지 상상은 뻗어나간다. 카페에 가면 대걸레의 위치를 체크해보기도 한다. 단 한 번도 카페에서 컵을 깬 적도 없지만 2층이 있는 카페에 갈 때마다 똑같은 상상은 되풀이된다.
매일 타는 엘리베이터. 이 엘리베이터에 만약 위험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타고 있다면? 최근 칼부림 같은 듣기만 해도 공포스러운 뉴스가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이런 상상을 자주 하게 된다. 답 없는 상황을 상상하고 혼자 기가 빨려 피곤해한다.
한강을 산책 겸 걸을 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갑자기 뒤에서 나를 밀친다면? 수영을 잘 못하는 나는 한강에 떨어지면 죽을 것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오면 일단 앉아야지. 그러면 나를 들지는 못하겠지? 지금 나는 엄청 무거우니깐. 그리고 만약 떨어지면 저기 보트가 하나 있으니깐 힘이 빠지기 전에 소리를 지르면서 SOS를 치면 살 수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이 상상은 '아 빨리 수영을 배워야 돼!!‘라는 계획을 짜면서 마무리된다.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고 남편에게 말하면 '도대체 왜 그런 상상을 해서 에너지를 낭비하니?'라고 말할 뿐이다. 그럼 나는 "이상한 상상이라도 해두면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덜 당황하고 대처할 수 있잖아. 그리고 수영을 배워야겠다는 다짐을 했으니깐 결국 생산적인 거 아니야?"라고 대꾸한다.
이상한 상상도 어딘가 쓸모가 있겠지 싶지만 사실 내 마음속으로도 이런 상상을 하고 싶지 않다. '시크릿'이라는 책을 보면 사람은 상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던데. 괜히 내가 맨날 재수 없는 상황을 상상해서 그런 재수 없는 기운이 나한테 붙을까 봐 또 불안해진다. 불안은 불안을 낳는다. 상상으로 인해 또 내가 그런 재수 없는 상황을 부르고 있는 건 아닌지 신경을 쓰느라 2차로 기가 빨린다.
도대체 나는 왜 이딴 상상을 통해 에너지를 반복적으로 빼고 있는지 스스로도 궁금할 정도다. 애초에 불안이 높은 기질 탓도 있을 것이다.
그냥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 먼저일 테고, 두 번째 영향은 역시 엄마다. 엄마 탓을 해서 미안하지만 우리 엄마는 생활 불안함이 높은 내가 봐도 '도대체 왜 저런 상상을 하지?' 싶을 정도다.
예를 들어 가족행사로 룸이 있는 고깃집에 갔을 때 이야기다. 엄마는 룸의 문을 자꾸 열어두려고 했다. 종업원이 와서 서비스를 해주고 갈 때마다 문을 닫아주었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문을 열라고 하는 것이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고기 굽고 있는데 연기 때문에 질식할 수도 있잖아'라고 말했다. 엄마의 안전강박을 옆에서 지켜보면 그 상상이 너무나 신박해서 웃음이 터질 때가 많다. 엄마의 신박한 안전강박 때문에 남편은 '장모님이 안전과 관련된 유튜브를 하면 대박이 날 것 같다'며 유튜브 제목을 지어주기까지 했다.
여하튼 나의 불안증은 엄마 정도(?)는 아니지만 일상생활이 조금 불편한 정도까지 이르렀다.
불안증이 폭발한 것은 아기를 낳은 직후였다. 출산 후 호르몬 때문에 안 그래도 매우 예민하고 우울한 상황이었다. '내가 아이를 잘 돌볼 수 있을까?', '열심히 키웠는데 아이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어떡하지?', '아이에게 안 좋은 일이 닥치면 나는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등의, 아이를 낳은 엄마라면 아마 99.9%가 겪는 불안함에 시달렸다. 누구나 겪는 불안과 우울의 시기임을 알지만 나는 스스로의 불안 때문에 너무나 스트레스를 받았고 이 불안이 아이가 너무 소중해서임을 알고 있었지만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보통 때라면 '도대체 왜 그따위 생각을 하느냐'라고 윽박질렀을 남편이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는 웬일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책임감이 큰 사람이어서 불안해하는 거야. 아이를 잘 키우고 싶고, 아이에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려고 애쓰는 마음이 크니깐 더 불안한 거야. 너는 책임감이 투철한 사람이니깐. 분명히 아이도 잘 키울 거야. 잘할 건데 미리 너무 불안해하지 말자."
나의 불안이 어쩌면 책임감 때문일 수 있다는 긍정적인 바라봄 덕분에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지금까지 스스로 나의 불안을 이해하려고 했을 때는 이 불안의 '쓸모'를 위주로 생각했었다. 어떤 철학자가 말했듯 불안은 나에게 '예방주사'임으로, 불행한 일이 닥쳤을 때 슬픔을 경감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번쯤 불행한 일을 상상하면서 미리 계획도 세워보고 감정도 예측하면서 시뮬레이션을 해보면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겼다.
불안할 때마다 불안의 쓸모를 되새겼지만 크게 나아지진 않았다. 남편이 나의 불안의 '원인'을, 그것도 긍정적인 원인으로 짚어주니 오히려 귀찮기만 했던 나의 불안과 공생이 가능해졌다. 엄마 탓을 하거나, 내 탓을 해봤자 별 소용이 없었는데. 이 불안이 나의 책임감으로부터 나온 증상이라 생각하니 증상을 다스리기 수월해졌다.
보통 아이를 낳으면 행복해야 하는데, 왜 나는 이렇게 불안하고 슬픈지에 대해 많은 산모들이 이야기를 한다. 혹은 이 이야기를 꺼려한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매우 복잡한 감정을 수반한다.
그와 관련해 2012년에 발간된, 꽤 오래된 책이지만 마크 롤랜즈의 '철학자와 늑대' 이야기를 좋아한다. 철학교수인 저자가 11년간 늑대와 함께 생활하며 쓴 동거일기인데 그는 대학 수업 중에도 늑대를 데려갈 정도로 늑대를 사랑했다.
이 책의 마크 롤랜즈는 '행복'은 하나의 감정이 아니라고 말한다. '행복'은 사람이든 늑대든 고양이든 사랑하는 대상을 생각하면서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포함해, 그것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슬픔과 혹은 내가 먼저 그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등이 뒤섞인 상태일 것이라 말한다.
그래서 복잡한 행복을 아는 것은 그 행복을 '책임'질 첫 번째 단계라고 한다. 이후는 이 사실을 알고도 책임을 질 수 있을 거냐 하는 문제다.
그의 사랑에 대한 이런 관점은 나의 관점과 비슷했다. 사랑은 항상 슬픔과 책임감과 부담감과 나에 대한 불안 등 부정적인 감정도 수반한다. 이것들이 모두 얹어진 사랑을 '그럼에도' 선택하느냐의 문제다. 깨끗한 사랑의 감정은, 사실상 사랑이 아니라 환상일 뿐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존재들 때문에 항상 불안한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