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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경 Jul 03. 2023

돌봄의 쾌락은 어디서 오나

인류가 멸망하지 않은 이유

"스스로 돌봄을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돌봄을 좋아한다는 것이 꼭 선하거나 착한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요즘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정지우 작가의 7월 2일 글 중 한 문장이다. 그는 이 글에서 자신은 예전부터 '돌봄에 취향'이 있었다며 지금까지 동생, 동물, 혹은 여자친구들을 돌봐왔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면서 돌봄은 일종의 취향으로, "존재를 아끼는 만큼이나 그 존재들에 대한 소유욕도 강하게 느낀다"며 돌봄과 소유욕, 지배를 연관시킨다. 돌봄 역시 "나 좋자고 한 것"이라고 쓴다.




나 역시 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돌봄을 생각할 때 희생, 선함과 같은 이미지만을 그렸다. 나를 위한 시간을 나 아닌 존재를 위해 쓰고, ‘나’는 뒷전으로 미뤄놓는 것 말이다.


정지우 작가는 지금까지 병아리나 개, 여자친구, 동생들을 돌봐왔다고 하지만 나의 경우는 이번 출산을 통해 정말 '돌봄'이라는 것을 처음 해보는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동물을 좋아하지만 한 번도 키워본 적이 없었고 동생도 없고 애인관계에서도 대체로 '돌봄을 받는 대상'이었다.  


그래서 책 '데이터는 어떻게 인생의 무기가 되는가'에서 '아기 돌봄'이 쾌락의 순위에 얹혀있을 때 '아기를 돌보는 게 쾌락이라고? 희생이 아니라?'라고 의아했다.


책 ‘데이터는 어떻게 인생의 무기가 되는가’에 나오는 행복활동표.




물론 아이를 돌보는 사람들이 힘듦을 이야기하면서도 '힘든데 행복해'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냥 통상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인 줄 알았다. 당연히 아이를 돌보면서 느끼는 가족이 주는 충만함, 성장하는 존재를 보면서 느끼는 뿌듯함, 아기의 귀여움, 사랑하는 존재가 날 사랑해 주는 데서 오는 만족감과 행복감 등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요소긴 할 것이다.


그런데 정지우 작가의 글을 읽고 생각해 보니, 아기를 키우면서 돌봄에서의 쾌락은 일종의 '통제'에서 오는 것도 있음을 알게 됐다.


예를 들어 며칠 전 아기 분유에 타주는 유산균 드롭을 평소보다 조금 많이 떨어뜨린 실수가 있었다. 원래는 한 방울만 떨어뜨려야 하는데 아마 3~4방울 정도가 떨어진 것 같았다. 그날 아기는 유난히 똥을 많이 싼 것 같았다. 나는 나의 아주 작은 행위에도 아기의 몸 전체가 영향을 받는 것을 보고 무섭기도 하고 '아기는 정말 내가 거의 전부이구나'하는 전지전능(?)함과 같은 것을 느꼈다.


실제로 아기를 안거나 기저귀갈이대에 눕힐 때마다 내가 아기를 떨어뜨리면 어쩌지 하는 공포감을 느끼는데 살짝 잘못하다가는 아기는 생명을 잃을 수도, 혹은 아주 큰 외상을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기의 교육에 대한 정보를 찾아볼 때도 (물론 아기는 내 맘대로 크지 않겠지만) 마치 내가 아기의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큰 착각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이 '통제'의 쾌락을 사실 살면서 거의 처음 느껴본 것 같다. 그래서 지금까지 누군가가 돌봄을 좋아하거나 돌봄에 열중할 때 '참 희생정신이 강한 사람이구나'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은 물론 훌륭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통제욕이 강한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본다.


나는 MBTI 마지막이 P가 나오는데 그때마다 그것이 의아했다. 왜냐면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다이어리 꾸미기'가 취미였던 사람으로, (중고등학교 때는 내 다이어리를 반 아이들이 돌려봤을 정도였다.) 계획 세우기에 환장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니 나같이 계획적인 사람이 왜 항상 J가 안 나오고 P가 나오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한 친구에게 P와 J의 차이점은 계획성이 아니라 '통제'에 대한 감각이라는 말을 듣고 단박에 이해가 됐다.


나는 정말 통제에 대한 욕구가 적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계획을 세우는 것은 좋아하지만 그것이 지켜지지 않아도 큰 상관은 없었다. (그냥 다이어리를 채우기 위한 계획이었던 걸로...) 지금은 조금 바뀌었지만 소유욕도 적은 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연애를 할 때도, 남자친구들에 대한 질투나 소유욕도 적어 남자친구들이 나를 굉장히 편하게(?) 생각했던 점이 있었다. 연락 여부에 대한 통제나 시간을 어떻게 보내든 별다르게 통제하려 들지 않았던 특징 때문이다.




이렇게 통제에 대해 큰 관심이 없으니 동시에 내가 지금까지 돌봄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러나 요즘은 거의 처음 배워보는 통제로 인한 쾌락에 지금까지 나의 정체성을 모두 잃을 정도다.


사실 '돌봄이 하루하루 즐겁다'라고 말하기는 뭔지 모르게 머쓱했다. 내가 마더 테레사 같은 사람도 아니고. 이제는 돌봄의 쾌락에 대해 조금은 이해가 갔다.


아, 이래서 인류가 멸망하지 않은 거구나.


아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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