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받는다고 진짜 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육아서를 읽는 것은 어쩌면 나의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인 것 같다.
육아에 지쳐버렸을 때, 우울할 때 누군가는 '육아서도 읽지 말고 그냥 내 것을 하세요~ 쉬세요'라고 충고한다. 또 흔한 충고로는 '아기와 분리되세요'라고 충고한다. 물론 나 역시 육아서를 읽지도 못할 만큼 멘털이 털렸거나 피곤할 때는 당연히 잠을 자거나 그저 의미 없이 핸드폰 스크롤을 내리며 머리를 비울 때도 있다.
그러나 육아로 인해 무언가 꽉 막히는 느낌이 들 때, 아기를 관찰해도 잘 모르겠을 때, 육아서를 읽으면 오히려 속이 시원해지고 아기에게 화가 나던 것이 이해가 가면서 육아가 아주 조금 수월해짐을 느낀다. 아기의 이해가지 않는 행동도 '네가 그래서 그랬구나'라면서 미안함 내지 이해로 풀어질 때가 많다.
그렇게 화가 이해로 전환되면 피로하고 우울하기만 했던 기운이 날아가고 그제야 '내 것'을 찾아갈 수 있는 동력이 생긴다. 육아로 지쳤을 때는 '내 것'이고 뭐고 아무것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아기와 분리되어라'라는 조언도 24시간 아기와 분리될 수 없는 경우 매우 유용한 조언이지만, (물론 내 경우 일주일에 2~3번 1시간 정도 분리되어 운동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아기와 잠깐 분리됐다가 돌아와도 풀리지 않는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주양육자'가 나일수밖에 없는 육아휴직 상황 속 '정신적으로' 나와 아이를 분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육체는 잠깐 떨어져 있을 수 있지만 말이다.
아기를 돌보는 사람이 나이기에, 아기 문제가 해결될 때 내 문제도 동시에 해결되는 것이다.
육아서를 읽고 가장 도움이 되는 부분은 나의 분노 조절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기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들이 실질적인 나의 육아라이프에 큰 도움이 됐었던 것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아이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육아서를 통해 이해하게 되면 10번 화나는 것이 7~8번 정도로 화가 나게 된다.
물론 육아서를 읽었다고 화가 안나는 건 아니다.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다르기에 완전히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 화가 치솟아 올랐다가 금방 수그러든다.
우선 첫 번째는 아이가 밥을 먹을 때 숟가락과 물통, 그리고 그릇을 끊임없이 떨어뜨리는 행위였다.
아기가 숟가락과 물통, 밥통을 끊임없이 떨어뜨리면 또 내가 물통과 수저와 그릇을 주어줘야 하기 때문에 화가 날 수밖에 없다. 몇 번은 그냥 주워주지만, 10번 이상 떨어뜨리면 떨어뜨리는 순간 화가 치솟기 마련이다.
아기에게 '떨어뜨리지 마~'라고 말을 해도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일부러(?) 툭!! 하고 떨어뜨리는 모습 때문에 더더욱 화가 나게 된다. 그 일부러 툭! 하고 떨어뜨리는 모습을 보면 '혹시 이것이 바로 훈육 타이밍인가?'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김수현의 아기 발달 백과' 9개월 정보에 따르면 아기들은 이때 높낮이를 인지하고 경계하는 발달 수준을 거친다.
그 외 다른 육아서들도 공통적으로 아기가 장난감이나 숟가락을 떨어뜨리는 행위는 아이가 땅과 자신이 앉은 높이에서 높이감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한다. 아기는 높은 곳과 낮은 곳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데, 장난감을 위에서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을 통해 중력과 높이감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사실 아기가 높이감을 배우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높이감을 어느 정도 인지한 아기는 침대에서 자기가 떨어지지 않으려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가장자리에서 떨어지는 것을 택하기보다 우는 것을 택한다.
이렇게 아기에게 높이감을 아는 것은 안전과 직결되기 때문에 수저나 장난감을 끊임없이 떨어뜨린다.
아기들은 반복해서 학습하는 것이다.
아기가 장난감을 떨어뜨릴 때 '그래 이건 아기가 학습을 하는 방법이야. 아기가 똑똑해지고 있어'라고 생각하니 일부러 숟가락을 툭 하고 내려놓는 행동에 화가 덜 날 수 있었다.
물론 20~30번 주워주다 보면 화가 날 때가 있어서 '엄마가 똥개니?? 그만 좀 해라~'라고 말하기는 한다. 그러나 이걸 훈육해야 할 타이밍인가?라고 생각하면서 일부러 더 단호하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이 시기가 지나고서도 계속 떨어뜨린다면 훈육이 필요할 때도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이것 때문에 훈육을 해야 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나도 육아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나의 생각이 틀릴 수는 있다. 맘카페 등에서도 이 행위 때문에 열받은 엄마들이 훈육을 해야 하는 건지, 중력을 배우는 중이니 그냥 내버려 둬야 하는지 헷갈려한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왜 아기가 저렇게 행동할까 이해할 수 있었고 가장 도움이 됐던 지식 중 하나다.
두 번째, 또 내가 화가 났었던 아기의 행동은 책들을 5초 만에 보고 다른 책이나 장난감으로 가는 행동이다.
엄마의 욕심으로는, 아기가 책을 만지작 거리면 '이 책을 읽고 싶나?'라고 생각되면서 그 책을 읽어주려고 한다. 책에 관심을 두는 것이 대견(?)해 하던 일도 멈추고 책을 읽어주려고 마음을 먹는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이거는 바나나~, 이건 사과~, 이건 토마토~이러면서 책을 넘겨주고 싶다.
그런데 아기는 책 한 장을 보고 또 다른 책을 또 뒤적인다. 또 그럼 '음~저 책이 보고 싶어?'라고 하면서 그 책을 읽어주려고 한다. 그러면 또 다른 책이나 장난감을 뒤적인다.
나는 아기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 '아기가 집중력이 없나?' 혹은 '나도 책 읽어주려고 마음먹은 건데, 왜 계속해서 다른 책을 가지고 오지? 아무리 아기가 집중력이 짧다고 해도 책을 세네 장도 못 보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미디어에 대한 육아서 내용을 통해서 아기가 왜 이렇게 하는지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많이 고민하는 13가지 질문에 대한 과학적 해답'이라는 책인데, 아기들은 2살 이전까지는 앞뒤 맥락이 있는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TV드라마를 본다고 해도 이전 장면과 다음 장면을 이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아기에게 드라마는 그냥 계속 바뀌는 화면일 뿐이다.
그렇기에 24개월 이전 미디어 노출이 교육에 도움이 되지 않고, 되도록이면 36개월 이전까지는 미디어 노출을 줄여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 책의 다른 부분도 정말 좋았지만 특별히 'TV는 교육에 득일까, 실일까' 챕터가 나의 관심 분야이기도 해서 흥미롭게 읽었다. 복직을 하면 영유아 미디어에 대한 인터뷰 시리즈를 기획해 볼까 할 정도로...(일단 말만 해본다.)
뇌과학을 연구하는 심리학자인 질 스탬은 만 0~2세의 영유아가 보는 TV프로그램은 화면으로 구성된 하나의 의미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화면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 아이의 기억과 이해력이 앞뒤 화면의 관계를 알아내고 판단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많이 고민하는 13가지 질문에 대한 과학적 해답', 제4장 )
그냥 배경화면처럼 TV를 켜두는 것 역시 좋지 않다.
폴리(Foley)의 연구에 따르면 침실에 TV가 있거나 집에 TV를 켜두는 경우 타인의 바람과 생각에 대한 유아의 이해력이 떨어져 타인과의 긍정적인 관계 형성을 방해한다고 한다. (...)
연구에 따르면 TV를 틀어놓는 것만으로도 부모와 아이가 대화하는 시간이 줄어들거나 부모가 아이를 형식적으로 대했다. (...)
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음악의 변화가 나타나거나 화면이 바뀌면 TV에 빠지게 되고 지금까지 하던 생각과 관찰은 중단된다.
이 외에도 이 책의 해당 장에서는 디즈니 사의 <리틀 아인슈타인> 환불 사건을 다루는데 매우 흥미로웠다. 디즈니는 리틀 아인슈타인이라는 프로그램이 영유아의 발달에 도움이 된다고 광고했으나, '상업화로부터 자유로운 유년기를 위한 캠페인'이라는 단체의 연구를 통해 그러한 결과를 도출하지 못함이 드러났다. 그래서 디즈니사가 2004년 6월 5일부터 2009년 9월 4일까지 이를 구매한 소비자에게 환불을 해준 사건이다.
디즈니라는 큰 기업이, 이 연구 결과를 반박하려고 반격을 준비했지만 실패했다. 이 프로그램이 언어 능력 발달에 분명히 도움이 된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관련 뉴스를 찾지 못했기에 영어 기사를 링크해 둔다. (혹시 찾으신다면 링크를.. 부탁드려요) 이러한 기사들이 많이 보이지 않는 것도, 영유아 미디어 리터러시에 큰 관심이 생기는 이유이다.
https://www.washington.edu/news/2009/10/29/disney-offers-refunds-for-baby-einstein-products/
환불 사건에 대해 디즈니 측은 이렇게 답변했다. "우리의 우선적인 목표는 부모와 아이의 상호작용을 장려하는 것이다. 우리는 부모와 자녀 사이의 상호작용을 증진하는 방법에 대해 줄곧 연구해 왔다. 앞으로도 우리는 계속 부모에게 여러 선택지를 제공해 아이와 상호작용할 기회를 늘릴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결국 TV프로그램을 보는 것 자체만으로 아이의 지능을 늘리거나 정서에 도움이 되는 증거는 없었고, 부모가 '아이와 함께 상호작용'을 할 목적으로 TV프로그램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맞다는 결론이다.
특히 0~3세 이하의 아기들에게 TV를 보여주면서 교육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 같다. 부모가 너무 피곤하면 어쩔 수 없이 보여줄 수도 있겠지만 이것을 교육 목적으로 포장하는 것은 틀린 말인 것 같다.
이 이야기를 책에 대입해 보면 앞에서 사과를 배우고 뒷장에서 바나나를 배우고, 또 그 다음장에서 토마토를 이야기하려는 어른의 생각, 즉 어떤 '음식'이라는 스토리를 한 장씩 배워갔으면 하는 것은 나의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히려 토마토 책을 보다가 개구리 책을 보고 수박 책을 보든, 토마토와 바나나와 사과를 일련적으로 배우든, 어쩌면 아기에게는 이것이 한 이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 화면 계속해서 전환되는 화면이기에 이 책 저 책 보아도 이 책 저 책을 보나 한 책을 넘기면서 보나 똑같은 그림, 똑같은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렇게 아기의 사고를 이해하고 나니 한 책을 쭉 보지 않는다고 해서 화가 나지 않았고, 다른 책을 봐도 '다른 화면으로 전환되는 것, 이 책의 다음장이나 다른 책의 다른 장이나 아기의 눈에 똑같을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니 다른 책으로 아기의 시선이 옮겨가도 나 역시 조급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영유아 전문가가 아니고.. 그냥 책을 통해 유추한 것으로 나의 화를 다스리기 위한 생각일 뿐이다.)
물론 아기가 조금 커서 '분류'라는 개념을 배웠을 때는 하나의 책을 죽 보면 좋겠지만 아직 그런 것을 이해하는 연령이 아니기에, 하나의 책을 죽 보았으면 하는 것은 어른의 욕심이 아닌가 생각했다.
사실 이것이 육아서뿐 아니라 내가 책을 읽는 이유다.
책을 통해 인생 단계단계 만나는 고민을 풀고, 방법을 찾아가려 한다. 그렇기에 나는 커다란 담론을 이야기하는 책 보다 디테일한 책을 좋아한다. 20대 때는 큰 담론을 다루는 철학책들을 주로 읽었지만 이제는 담론에 관한 책 보다 실용서와 자기 계발책들(중에서도 뇌과학이나 루틴 or 습관을 다룬, 디테일한 책들)에 손이 간다.
나에겐 '쉬세요'라는 위안보다 바로 앞에 닥친 문제를 타계할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오히려 더 빠른 쉼을 얻을 수 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