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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경 Jul 09. 2023

모든 순간을 기록하려는 욕구

망각이라는 인간적 기능이 필요한 이유

육아 선배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조언 중 하나가 "사진이나 영상 많이 찍어둬."라는 말이었다. 나는 일상의 많은 순간을 사진으로 많이 남겨두는 편이다. 그래서 이 조언을 듣고 행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고 아기 사진을 자주 찍어댔다.


많은 이들이 아기를 낳으면 사진을 급격하게 많이 찍을 것이다. 


그런데 아기 사진을 찍다 보면 항상 비슷한 모습이 찍힌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아기들도 귀신같이 카메라를 의식해서 평상시대로 행동하지 않고 카메라를 쳐다보는데 여념이 없다. 정작 내가 찍고 싶었던 귀여운 모습은 놓치기 일쑤고 항상 멀뚱히 카메라를 쳐다보는 비슷한 표정만 찍혀있는 이유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서 인기 있는 아기 숏츠를 보면 분명 우리 아기도 숏츠에 나오는 것처럼 행동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순간을 카메라로 담는 건 운의 영역이다. 계속 영상을 찍고 있는 상태가 아니면 포착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많다. 


또한 보통 가장 예쁜 순간은 보통 내가 두 팔로 아이를 안고 있을 때여서, 카메라를 들 손이 없다. 그래서인지 사진을 몇백 장을 찍어도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


아기가 나에게 안겨있을 때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집안 곳곳 작은 거울들을 놔뒀다.



 

또한 내 눈에서 보이는 각도로 찍혀야 가장 귀여운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 눈의 각도가 아닌 손이 들고 있는 카메라 각도로 찍으면 내가 원한 그 각도가 아니다. 이 경험은 꼭 아기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이 아니어도 공감할 것이다.


대표적으로 산에 올라가서 멋진 풍경을 찍을 때다. 그때 사람들은 “아, 내 눈에 보이는 그대로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내가 자주 생각하는 것이 카메라를 렌즈로 착용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아주 예전부터 있어와서 '안경 카메라'라는 물건이 있고, 옥션에서 약 20만 원에 팔고 있다. 다만 후기들을 보면 안경 카메라의 성능이 그다지 좋지 않고, 불법 촬영이 이뤄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물품이라 일반적으로 사고파는 물건이 되기는 어려워 보였다. 실제로 이 물품으로 인한 불법촬영 범죄가 종종 일어나니, 복잡한 심경이 든다.


 



이런 생각을 영상으로 옮긴 콘텐츠가 있다. 꽤 오래전 콘텐츠이다. 2011년 공개된 블랙미러 시즌1 에피소드 3이다. 블랙미러 시즌1이라고 하면 너무나 강력한 첫 번째 에피소드만 이야기되곤 한다. 수상과 돼지와의 수간 장면이 있는 에피소드 말이다. 그러나 나는 시즌1에서 세 번째 에피소드를 가장 좋아했다.


블랙미러 시즌1 세 번째 에피소드, '당신의 모든 순간'의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벌써 12년 전 에피소드이니 이걸 쓴다고 해서 스포일러라고 하진 않겠지..)




이 에피소드는 자신의 일상을 전부 녹화해 주고 기록해 주는 체내 삽입 단말기가 만들어진 미래의 이야기다. 이 단말기를 귀아래 삽입하면 자신이 보고 들은 기억들을 모두 녹화해 주고 보존하고 눈앞에서 재생하고 화면에 띄워 남과도 볼 수 있다.


이 단말기가 있기 때문에 기억 왜곡은 할 수 없고 ‘팩트’를 모든 사람 앞에서 재생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서 이 단말기를 사용하지 않는 부류도 있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는다. (물론 현재도 블랙박스나 CCTV가 이와 비슷한 역할을 하긴 한다.)

   

블랙미러 시즌1, 에피소드 3 '당신의 모든 순간'.


주인공인 한 남성은 아내의 외도를 의심한다. 그래서 아내의 단말기에서 특정한 시간에 무얼 했는지 재생하라고 시킨다. 아내는 자신의 단말기에서 외도의 순간을 지우려다가 남편에게 들키고, 결국 아내의 단말기에 녹화돼 있는 외도의 순간을 남편과 함께 봐야 할 상황에 놓인다. 결국 그들은 헤어진다.


혼자 남은 남편은 아내가 외도를 저지른 공간인 집에서, 자신이 아내와 함께 보낸 시간들을 반복재생하며 슬픔에 빠진다. 아내와 함께 있던 기억을 재생하다가 남편은 스스로의 몸을 찢어 단말기를 꺼내버린다.


블랙미러 시즌1, 에피소드 3 '당신의 모든 순간'.




이 에피소드는 일상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는 나 같은 사람이 솔깃할 만한 장치를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 꿈같은 장치가 어떤 절망을 가져오는지도 보여준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끔찍한지 말이다.     

 

사람들은 종종 둘째나 셋째를 낳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까먹어서 그렇지’, ‘망각의 동물이기에 할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아이를 낳는 일 말고도 사람이 망각 덕분에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역시 아직은 인간적 기능(?)인 망각이 필요할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종종 인간사회는 더 많은 기술발전을 할 수 있지만 법과 제도로 그것을 막아선다.


나도 아직은 나의 일상들을 모두 찍어놓는 영상들보다는 어느 정도의 망각과 함께 환상을 곁들일 수 있는 사진과 텍스트로서의 기록을 선호하는 것 같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 가장 담고 싶은 순간은 카메라로 담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나 기록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짧은 글이지만 언제 울려 퍼질지 모르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맞춰 몇번이나 끊어지는 글쓰기를 그럼에도 계속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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