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뭇잎 Oct 22. 2023

우리 이모, 강인숙

방학 때마다 3박 4일로 부산에 있는 외갓집에 갔다. 기차를 타고, 다시 택시를 타니 도착하기까지 세 시간 남짓 걸렸다. 오랜만에 온 외갓집이 어색하여 쭈뼛쭈뼛 초인종을 누르면 이모가 제일 먼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무릎과 허리가 아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보다 먼저.

“인숙아, 잘 지냈어?” 우리 엄마가 막내 이모 등을 두드리며 인사를 했다. 이모는 오랜만에 본 언니와 조카가 반가워서 그냥 웃었다. 어쩜, 집에 사람이 온 것 자체가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막내 이모는 말을 못 했다. 태어난 지 6개월도 채 안 되어 심하게 앓았다. 그 이후로 다른 집 아이보다 앉는 것도, 걷는 것도 한참을 늦었다. ‘어어’라는 목구멍에 걸린 듯한 말만 입안에서 중얼거렸다. 말을 못 하는 이모는 또래보다 1년 늦게 학교에 갔다. 6남매 큰딸인 우리 엄마가 당신보다 14살 어린 이모의 손을 잡고 학교에 데려다줬다. 엄마는 막내 이모를 혼자 두고 차마 발 길이 떨어지지 않아 학교 주변을 맴돌았다. 창밖에 숨어 몰래 이모가 교실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지켜봤다. 한 살 어린 같은 반 아이들 속에서 역시나, 이모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이모는 그렇게 초등학교를 끝으로 더 이상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막내 이모는 침을 흘렸다. 밥을 먹을 때는 더욱 그러했다. TV를 보면서 무표정하게 있을 때도 침이 입술 옆으로 흐를 때가 많았다.

“할머니, 이모는 우리보다 나이도 많은데 밥 먹을 때 왜 음식을 자꾸 흘려? 침도 흘리고. 이모는 바보야?”

나보다 두 뼘 이상 키가 큰 이모가 왜 아기처럼 행동하는지 궁금했다. 나는 남동생, 사촌 동생과 함께 마당에서 숨바꼭질했다. 뛰어다니는 우리 곁으로 이모가 슬며시 다가왔다.

“나 잡아봐라, 잡아야지.” 우리는 이모를 술래로 만든 후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모보다 한참이나 어린 우리도 이모가 술래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할 줄 알고 있었다. 이모는 계속 웃기만 하며 두 손을 양어깨만큼 벌린 채 뛰었다. 손주와 딸이 하는 놀이를 외할머니는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막내 이모는 가족 외에 만나는 사람이 없었다. 평소에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집에서 생활했고, 가끔 외할머니 따라 목욕탕에 갔다. 그게 전부였다. 목욕탕 다녀오는 길, 할머니가 미끄러져 발목을 접질린 후에는 그마저 외출도 어려웠다. 우리가 외할머니 집에 가는 날이면 큰 언니인 우리 엄마가 이모를 욕실로 데리고 갔다. “엄마 힘드니까 오늘은 언니랑 씻자. 가만히 좀 있어 봐. 깨끗이 씻어야지.” 어린 우리도 씻기고, 다 큰 이모도 씻기고, 목욕 후 나온 옷도 빤 엄마는 지쳐 보였다.      


막내 이모는 마흔이 채 되지 않아 하늘나라로 떠났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보다 훨씬 더 먼저. 이모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던 무렵 감기에 걸렸다. 환절기 감기는 오래갔다. 약을 먹어도 쉬 낫지 않았다. 감기니까 괜찮겠지, 했는데. 아침저녁 기온은 제법 쌀쌀했지만, 낮 햇살은 참 좋은 9월이었는데. 이모가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폐렴’이 되어 입원해야 하는 상태라고 했다. 입원한 이모는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외할머니는 “인숙이가 나보다 먼저 가서 다행이야. 남은 자식들도 편하고, 갸한테도 좋은 일이다.”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후로, 외할머니는 오랫동안 아팠다. 


막내 이모는 많이 웃고 많이 울었다. 내가 기억하는 모습은 웃거나, 울거나 딱 두 가지이다. 가끔 밖에 나가 기분이 좋거나, 아는 사람을 만나 기쁘면 웃었다. 이모의 마음을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으면 울음으로 표현하곤 했다. TV를 골똘히 보거나, 가족과 함께 식사하거나, 누워서 쉬거나, 집 앞 골목길을 산책하는 것처럼 일상의 수많은 표정이 이모 얼굴에도 담겨 있었을 텐데 내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다.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사진첩에서 이모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 속에, 어린아이 세 명은 브이를 그리고 있었고, 이모는 엉거주춤 옆에 서 있었다. 두세 걸음 떨어진 채.    


나이가 들면 학교에 가고, 학교를 졸업하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게 그저 당연한 일인 줄 알았다. 특별하지도 않은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우리 이모인 게 어쩐지 서글펐다. 그래도 우리 이모 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누구나 먹고사는 것도 힘들었으니까. 느린 아이까지 공부시키고 치료실 다니고 그럴 수 없었으니까. TV 드라마에서 장애가 있는 언니를 시설 사회복지사에게 맡겨놓은 주인공이 운다. 부양 의무를 위해 돈을 벌며 따로 떨어져 살기로 한 그녀에게서 내가 아는 얼굴이 겹쳐 보인다. 이모를 먼저 떠나보내면서도 ‘이게 좋은 일이야.’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엄마와 외할머니 모습 말이다. 오래전 나는 헤아리지 못했지만, 지금은 어렴풋이 알고 있다. 우리 곁엔 여전히 이런 가족이 가슴을 치며 살아가고 있다는 걸.



이전 02화 날개 꺾인 킥보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