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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뭇잎 Oct 22. 2023

열네 살, 너에게

지훈아, 안녕. 2002년 처음 만났을 때 너는 14살 사춘기 소년이었어. 선생님이 네 집에 간 날, 뽀얀 얼굴에 막 여드름이 나기 시작했고, 웃어주는 반달눈이 참 예뻤어. 너와 함께 1년 동안 어떻게 공부할까 계획을 세워야 했지. 선생님이 수학 문제도 내고 속담 퀴즈도 물어봤는데 다 맞추더라. 속으로 깜짝 놀랐어. 초등학교 다닐 때도 일주일에 한 번씩만 학교에 나갔다고 들어서 중학교 과정 문제는 어려우리라 생각했거든.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 힘없이 끼워져 있는 연필로 문제 풀이 과정을 적어 내려갔어. 손과 연필 사이의 공간은 많았지만, 글씨는 어쩜 그렇게 예쁜지. 잘 풀었다고 칭찬해주니 수줍은 듯 씩 웃었어.     


사실, 길쭉한 두 손보다 더 가느다란 다리가 무릎담요 사이로 얼핏 보였을 때, 마음이 아팠어. 너에게 찾아온 근육병이 아니었으면 학교에서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집에서 수학 문제도 풀고, 한글 타자 연습도 하고, 그림도 그리면서 보낸 너의 시간은 어떤 빛깔이었을까? 생명이 움트는 봄의 연둣빛, 더위를 식혀주는 여름 바다의 푸른빛, 온 세상을 바꿔주는 가을의 붉은빛,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을 담은 겨울의 회색빛을 몇 번이나 봤을까?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너의 눈과 마음에 따뜻하고 고운 빛을 담아주고 싶어 우리는 가끔 숲으로 갔었지. 우리의 외출은 쉽지 않았어. 자원봉사자 대학생, 사회복지사, 숲 해설가와 함께하는 시간이라 쉽지 않은 길도 힘을 내서 올라갈 수 있었어. 지훈의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에는 어울리지 않는 시끌벅적한 나들이라 조금 걱정도 했었단다. 처음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어느새 환하게 웃고 있는 너의 얼굴을 보며 나오길 참 잘했다 싶었어. 등산 모자 쓰고 바람을 막아주는 겉옷을 입은 지훈이의 모습은 영락없는 산악인인데. 산악인이 뭐 별건가? 산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이 산악인이지. 두 발로 밟을 순 없어도 휠체어 바퀴를 통해 느껴지는 낙엽의 푹신함, 작은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의 달콤함이 긴장했던 우리를 쓰다듬어주었지. 


선생님이 지훈이에게 미안한 게 있는데 고백해도 될까? 지훈이가 일주일에 한 번 오는 학교였는데, 등하굣길에서의 난감함을 그때는 잘 몰랐었네. 20년 전이라, 학교에 엘리베이터도 없었지. 2층에 있는 교실에 가기 위해선 어느 국회의원이 기증했다던 리프트를 사용해야만 했어. 계단에 리프트를 설치하고 너와 함께 기계에 올라타면 계단을 올라가던 친구들이 우리를 오랫동안 쳐다봤잖아. 신기하다는 듯이. 친구도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텐데 자주 볼 수 있는 기계가 아니라서 그랬나 봐. 너는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지. "다 왔어요?" 올라갈 때와 같이 내려올 때도 어색한 시간을 반복해야만 했어. 다행히 지훈이가 입학한 후 1년쯤 지나,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어. 난감한 시간을 그리 오래 보내게 했다니, 선생님이 학교 대표로 미안하다고 말할게. 이제서야.


지훈이와 그렇게 중학교 3년을 보내고 졸업하는 날이 되었어. 지훈이 부모님 그리고 이모와 사촌 형제들까지도 와서 졸업을 축하해주었지. 일주일에 한 번씩밖에 못 왔지만 3년을 꿋꿋하게 잘 다녀준 너에게 선생님은 참 고마웠단다. 부모님도 같은 마음이었을 거야. 아니, 선생님보다 천배 만배 더욱더 그러셨을 거야. 노랑 빨강의 환한 꽃다발을 들고 있는 너를 보며 아버지가 감격에 찬 어조로 이야기했지. 꼭 지켜내리라 다짐하듯 말이야. “3년 후 고등학교 졸업식 때도 초대할 테니 꼭 오셔야 해요. 꼭 그렇게 할 겁니다.”     


선생님은 이후에 광명에서 부천으로 집과 학교를 옮겼고 핸드폰도 바꾸었어. 선생님도 참 어렸나 보다. 인연을 이어가는 일에 미숙했나 봐. 지훈이가 살던 아파트 이름과 위치도 아직 기억하는데 이젠 다른 이름의 아파트가 되었더라. 재건축 바람으로 동네가 많이 변했더라고. 지훈아, 어디서 지내든 간에 그곳이 너에게 더할 나위 없이 예쁘고 따뜻한 곳이었으면 좋겠다. 휠체어 위에서 추위를 많이 타던 네가 담요 없이도 밝게 지낼 수 있는 곳. 지훈이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가깝게 있는 곳. 혼자 집에 있을 때 바닥에 떨어진 전화기를 줍다가 허리를 펴지 못해 119가 올 때까지 울고 있었잖아. 누군가는 네가 하늘나라로 떠났을 거라고 이야기해. 세상이 뭐라고 말해도 지훈이는 대학교도 가고, 직장인이 되어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뽀얗고 동그란 얼굴의 14세 지훈이 얼굴을 가끔 떠올려봐. 선생님의 싸이월드에 소중했던 순간이 남아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우리 지훈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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