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뭇잎 May 07. 2023

우영우와 비슷하지만 다른 그녀

천재적인 두뇌와 자폐 스펙트럼을 동시에 가진 주인공이 대형 로펌에 신입으로 들어가서 고군분투하는 드라마가 인기였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드라마 속 우영우는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제 이름은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우영우’라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의 눈을 보고 인사하는 것은 어려워한다. 반면에, 사건과 관련된 법조문은 카메라로 찍은 듯이 읊어댈 수 있는 기억력을 가졌다.     


우리 반 예주는 우영우와 비슷하지만 다르다. 항상 얼굴은 웃고 있지만, 눈길은 누구를 보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 예주의 가방 속에는 필통 3개가 들어 있다. 든 게 많은 필통 3개만으로도 가방은 꽤 무겁다. 하지만, 예주는 3개의 필통을 한결같이 소중히 가지고 다닌다. 3개 모두 천으로 된 필통이지만 쓰임새는 모두 다르다. 살구색 필통에는 수업 시간에 사용하는 필기구, 흰색 바탕에 하늘색 꽃무늬 필통에는 색연필과 네임펜, 분홍색 격자무늬 필통에는 사인펜이 들어 있다. 예주는 각각의 필통에서 도구들을 꺼내 쉬는 시간에는 그림을 그린다. 그림 그리기에도 예주만의 루틴이 있다. 연필 쥐듯이 펜을 잡는 것이 아닌, 네 손가락으로 굵은 검은색 플러스펜 중간 부분을 감싸 쥔다. 주로 인물을 많이 그리는데, 이마 중간부터 시작하되 턱 부분은 날렵하고도 뾰족하게. 커다란 눈망울에 눈동자는 왼쪽과 오른쪽 그리고 아래쪽에 세 개의 동그라미로 표현한다. 속눈썹은 아래와 위 모두 풍성하게. 대상이 여성일 경우 딸랑거리는 별 귀걸이 2개를 양쪽 귀에 그린다. 색연필로 색칠을 마쳤다면 상의 위에 주인공 이름을 쓰는 것을 잊지 않는다.


자폐인들은 남의 말에 잘 속고 거짓말을 못 하기로 유명합니다. 사람들은 나와 너로 이루어진 세계에 살지만, 자폐인은 나로만 이루어진 세계에 사는 데 익숙해서 그렇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중에서>

나로만 이루어진 세계에 사는 데 익숙한 예주, 수업 중간중간에 이야기한다. 자신에게 묻는 건지 상대방에게 이야기하는 건지 헷갈릴 때도 많다. “예주는요? 예주는 이거 언제 해요? 예주는 이거 어려워요. 수업 시간에 큰 소리로 이야기하면 안 돼요? 집중해야 해요.”


예주가 중학교에 입학한 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시설관리실에서 전화가 왔다. 3월 신학기에 심은 화단의 꽃의 꽃잎을 누가 자꾸 따는 것 같아 CCTV를 살펴보았더니 인상착의가 우리 반 학생인 것 같다는 전화였다. 잔머리 없이 넘겨 하나로 묶은 머리에 머리띠 모습이 딱 예주였다.

화들짝 놀란 내가 “어머나, 꽃잎을 정말 뜯었어? 왜 뜯었을까?” 끝은 물음표로 끝나지만 진짜로 묻는 말은 아니었다. 책망이 담겨있었다. 보기 좋은 꽃잎은 그냥 두지, 왜 뜯느냐는.

“꽃 뜯으면 안 돼요. 예주가 꽃 예뻐서 뜯었어요. 예주 뜯으면 어떡해.”라고 응수했다.    


“성적을 잘 받으려면 공부해, 살 빼려면 운동해. 대화하려면? 노력해. 원래 방법은 뻔해. 해내는 게 어렵지. 근데 되게 오래 걸려. 노력한다고 바로바로 되고, 대화는 그런 게 아니거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중에서>

드라마 속에서 우영우 변호사는 피고인과 도무지 대화할 수 없자 아빠에게 방법을 문의한다. 그리고 아빠의 대답은 상대가 좋아하는 걸 파고들어 대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것.  


20년 차 특수교사지만, 상대가 좋아하는 걸 파고들면서까지 대화할 수 있도록 완전한 노력을 기울인 적은 없다. 예주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대상을 볼 때 그림 그릴 때의 눈빛과 비슷한지를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예주의 마음을 읽어준 뒤 화단의 꽃은 좋아하는 많은 사람이 함께 보는 꽃이니 꺾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줬어야 했는데. 예주에게 눈빛과 말로 야단하기에 바빴다. 어찌 보면 꽃을 뜯은 예주보다 꽃을 꺾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내가 더 나은 사람은 아니지 않나. 그저 예쁜 것을 보면 만지고 싶고, 갖고 싶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린 어른일 뿐인데.      


예주 어머니는 “학교 친구들이 우리 예주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처럼 생각할까 봐 걱정이에요. 자폐라고 그렇게 다 똑똑한 건 아닌데.”라고 했다. 기억력이 좋아 어떤 영역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내는 우영우에게 열광하기보다는 가치 있고 아름다운 삶을 위해 매 순간 노력을 다하는 우영우에게 응원의 손뼉을 쳐주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손에 힘을 주고 꾹꾹 눌러 그린 그림 속에서 예주의 마음을 훔쳐보려 애써본다. 우영우 변호사가 힘든 순간에 떠올리는 고래 같은 존재가 우리 예주의 그림 속에 담겨있지는 않은지 감히 상상해 보면서. 여하튼, 예주의 그림 속 주인공은 늘 환하게 웃고 있어서 좋다. 매일 아침 우당탕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들어와서 아침 인사를 건네는 예주처럼.     

이전 05화 왜 나한테만 그러는 걸까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