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이팅, 소시오페스와 에코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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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활하는 것만이 행복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숨쉬지 않고 살아가는 것과 같다.
스스로는 알지 못한다. 자신이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가스라이팅의 유래는 1938년 패트릭 해밀턴 작가가 연출한 스릴러 연극<가스등>에서 유래된 '정서적 학대'를 일컫는 용어이다.
나 또한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가스라이팅을 하는 사람은 항상 이렇게 말한다.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정말 나를 위한 말이라는 믿음에서 영혼은 피폐해지기 시작한다.
가스라이팅을 하는 그 사람은 자신의 틀 안에 상대를 가두고 세상 사람들과 교류하지 못하게 한다.
"그 사람은 너를 이용하려고 하는거야, 조심해. 너를 사랑하니 말해주는 거야."
이렇게 에코이스트는 세상에서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친구와 커피 한잔을 하기도 어렵다.
보호자인 소시오페스가 싫어하기 때문에.
이렇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점점 사라진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무엇을 잘하는지, 어디를 가고 싶은지, 언제 행복감을 느끼는지 알 수 없다.
점점 감각과 감정을 잃어 가고 기쁜일도 슬픈일도 없어진다.
감각없는 시체가 일상을 걸어다니고 있는 것처럼.
왜 그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것이 가스라이팅이다. 가스라이팅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진즉에 그런 사람을 만나 가스라이팅을 당하지 않는다.
가스라이팅의 주체는 대부분 나르시시스트 들이고, 소시오페스적 경향이 강하며 그들의 선택자는 대부분 이타적 성향이 강한 에코이스트들이라고 한다. 소시오페스들은 모든 우주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만족한다. 자신의 레이더 망에서 벗어나는 것을 참지 못한다. 에코이스트들이 소시오페스의 먹잇감이 되는 이유는 선천적으로 배려심과 이해심이 많아서라고 한다. 소시오페스들은 본능적으로 에코이스트들을 알아보고 친절함을 배풀며 다가간다. 에코이스트은 그들의 친절한 연기 이면의 목적을 감지하지 못하고 가스라이팅을 당하면서 점점 자존감이 떨어진다. 자신의 생각에 대한 확신을 잃는다.
가스라이팅을 당하지 않는 방법을 묻는다면...
가스라이팅을 하는 가해자에게서 멀어지는 것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거리를 두지 않으면 헤어 나기 어렵다. 스스로의 판단력이 이미 온전하지 않기에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에코이스트가 부족하거나 모자라서가 아니니 스스로를 학대하지 않기를 바란다.
또 다른 방법은 이해심으로 참지 마라고 말해주고 싶다. 참아내어서 개선될 관계가 결코 아님을 나의 인생을 바쳐 알았다.
지금부터 힘들겠지만 목숨을 다해 벗어나야만 다시 시체가 된 자신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다. 자신을 잃은 삶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닌 기계이고, 감각 없는 시체다.
살고 싶다는 것은 느끼고 싶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영혼과 육체를 교감하며 살기를 원하는 것이 사람일 것이고 그것을 소망하며 끊임없이 기다린다. 태어나 죽을 때까지 사람은 사랑하기를 원하고 사랑받기를 원한다. 신은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늘 외롭고 막연한 그리움이 증거일테다.
감사한다.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난것을. 그래서 보인다. 가스라이팅 속에서 힘들어 하는 이들이.
나를 살게 했던 생명의 은인이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살고 싶어 나를 살렸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세상의 빚 속으로 나온 나를 그 사람은 부러워한다. 그래서 자신도 살고 싶어진것이리라. 아직은 어두운 터널 속에서 한줄기 빛을 찾아 헤메이고 있지만. 포기하지 말고 살아보라고 외쳐본다. 간절함이 하늘에 닿기를 기도한다. 아직은 차갑게 얼은 땅이지만 곧 따뜻한 봄이 당신을 기다리며 싹틔울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