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장마를 지나간다.

by 제밍






시간이 지나가고 그 위를 내가 지나다 보면 피할 겨를 없이 쏟아지는 계절의 폭풍 한가운데 또한 지나가게 되고. 대체로 그 폭풍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대부분 그 폭풍을 즐기려 마음을 먹는다. 이 세상 벚꽃이 흩날리는 따사로운 사월에 맞춰 조금 먼 공원으로 산책을 간다던가, 온 세상을 덮어버릴 눈 내리는 십이월에 새삼 두꺼운 장갑을 끼고 나선다거나. 사월과 십이월 같은 계절의 폭풍은 꽤나 즐겁고 한편으론 설레는 폭풍에 속하지만 꽤나 그렇지 않은 폭풍 또한 존재해서, 이름만으로도 눈앞을 뿌옇게 하는 장마라는 팔월의 폭풍이.

매년 하늘에서 쏟아지는 장대비가 똑같지 않듯 매년 지나는 장마 또한 그렇다. 순식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물드는 사랑
이라던지, 옷이 마를 새도 없이 다시 젖어드는 미움이라던지, 앞으로 며칠을 더 버텨야 할지 모르는 무기력이라던지. 매년 더 튼튼하고 커다란 우산을 쓴다 한들 바짓단이나 소맷자락, 머리카락 끝이 젖지 않는 장마란 존재할 수 없듯. 아무리 애써도 찾아온 장마엔 젖어들 수밖에 없다.

올해 팔월의 폭풍은, 무기력이 쏟아지는 장마였고, 내리는 장대비에 뇌세포와 손가락이 녹아버린 듯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그 사실이 사무치도록 한탄스럽거나 억울하진 않다. 물론 젖은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게 어디 장마뿐일까.

장대비가 내리는 걸 보니 아, 팔월이구나 하고. 어느새 그친 장대비와 말라가는 마음을 보면 아, 팔월을 지나는구나 가을이 오겠구나 하는 거지.
찾아온 장마는 지나가기 마련이다, 계절이 지나가듯.

그리고 다시 찾아오기 마련이다, 계절이 다시 오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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