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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븐클라우드 May 11. 2022

밤의 카페테라스 10

10. 엄마의 엄마

  일요일, 십자수를 돌돌 말아 가방에 넣고 요양원으로 향했다. 엄마는 내가 바로 앞에까지 다가가도 마치 내 뒤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저 너머만 바라보았다. 내가 아닌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기대했던 그 사람이 아닌 것처럼. 좀처럼 내 눈을 마주 보지 않았다. 지난겨울에는 나를 알아보기까지 일이 분쯤 걸렸다면 이젠 오 분쯤 서 있어야 아, 왔구나, 반겨주게 되었다. 때로는 다른 할머니나 간호사가 할머니, 따님 오셨네요, 보다 못해 큰 소리로 알려주기도 했다. 그래도 엄마는 딴생각에 빠진 듯 한참 허공을 보다가 비로소 아, 왔구나, 말하며 웃어 보였다. 엄마, 나 알지? 설마 하면서도 별것 아닌 것처럼 엄마 팔에 기대며 물어보면 아이고 얘, 당연히 알지. 엄마가 딸을 몰라보겠니? 대답했지만 왠지 대답까지 망설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것 같아 슬퍼졌다.

  엄마, 요즘은 무슨 생각해요? 화분들 몇 개를 얹어놓은 창가에 나란히 앉아 밖을 내다보며 물었다. 글쎄, 요즘엔 별생각을 안 하는데……. 그래도 뭐 가끔 생각나는 게 있을 거 아니에요. 내심 답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딸 생각하지. 우리 딸 잘 지내나, 우리 딸 잘 지내야 할 텐데, 우리 딸이 있어서 참 좋구나. 그런데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한참 후 들릴락 말락 작은 소리로 말했다. 요즘은 엄마가 보고 싶네. 왠지 엄마 생각이 자꾸 나더라.

  잊고 있었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엄마 말로는 할머니가 워낙 차갑고 매정한 성격이라 엄마와도 별다른 정이 없었다고, 남들 같은 다정다감한 모녀 사이는 아니었다고 했다. 언제나 꼬장꼬장하고 깔끔해서 쉽게 곁을 내주지 않았던 할머니. 연세가 구십에 가까워지면서는 어제 일도 기억하지 못하셨고, 당신이 했던 말도 떠올리지 못하는 게 두려워서 수첩에 그때그때 깨알같이 적어두었지만 나중에는 그 수첩을 어디에 두었는지도, 끝내는 수첩의 존재마저도 잊고 말았다. 나를 보고도 누구인지, 당신에게 손녀가 있기는 한 건지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돌아가실 때까지 당신의 딸은 알아보았다. 엄마를 보면 왜 이렇게 손이 차갑냐,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말씀하며 손을 꼭 움켜쥐고 놓지 않으셨다. 돌아가실 즈음엔 거의 미라 같았던 할머니. 얇은 살에선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고 아기처럼, 혹은 인형처럼 작고 가벼워지셨다. 그때도 엄마는 많이 울지 않았다. 내게 밥 먹었냐고, 저기 육개장에 밥 먹으라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나를 알아보는 데 몇 분이나 걸리는 엄마가 할머니를, 당신의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다니. 

  바보 같은 투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울컥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게는 엄마밖에 없지만 엄마에겐 딸 말고도 엄마가 있구나. 내게 엄마가 가장 기대고 싶은 사람, 가장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준 사람이듯이 엄마에게도 할머니가 그런 사람일 텐데, 왜 나는 이 세상에 엄마와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까. 왜 내게는 엄마가 그렇게 소중하면서 엄마에게 엄마의 엄마가, 할머니가 그런 사람일 거라는 생각은 미처 못 했을까. 왜 엄마에게도 나뿐일 거라고 의심 없이 믿었을까. 유치하지만 갑자기 엄마를 뺏긴 듯한 기분, 엄마가 날 버려두고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엄마는 할머니에게 가려고 한다. 어쩌면 엄마는 나를 여기 두고 가는 슬픔보다 할머니에게 가는 안도감이 더 클지도 모른다. 너무해, 엄마. 나는 이렇게 엄마 생각만 하는데, 그래서 이미 엄마와 함께 벌써 세상을 다 산 것처럼 누워 있는데, 밤마다 불안하고 슬퍼서 잠도 못 자고 있는데, 엄마가 이렇게 나를 걱정하지 않을 줄 알았다면 차라리 나도 엄마 걱정 말고 막살걸 그랬어. 잔뜩 심통 내며 억지 부리는 내 모습에 헛웃음이 났다. 그만해 바보야, 그만하라고. 엄마는 이렇게 살라고 한 적 없어. 그러니까 그만해.

  가방에서 십자수를 꺼내 펴보였다. 엄마, 이거 어때요? 요즘 만든 건데 액자 해서 엄마 줄까? 엄마는 슬쩍 보더니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려버렸다. 이런 거 눈 나빠져. 이런 거 너무 많이 하지 말고, 눈 생각해서 약도 좀 챙겨 먹고 해야지. 세상에 예쁜 그림이 얼마나 많은데 왜 그런 걸 만들고 있니. 나는 묵묵히 십자수를 다시 말아 넣었다. 별로 안 예뻐요? 뭐 그냥 어두컴컴하네. 이왕 할 거면 좀 환한 거로 만들지 그랬니. 혼자 열심히 허우적대던 연못에서 순식간에 휙 끄집어내진 기분이었다. 온몸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꼴이 서글펐지만 어디에다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그러네, 좀 환한 그림으로 할 걸 그랬나봐요. 꽃다발이나 뭐 그런 걸로. 아니다, 요즘 예쁜 그림 많으니까 괜히 눈 버리지 말고 비타민 같은 거나 잘 챙겨 먹고, 알았지? 예, 엄마. 그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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