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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븐클라우드 May 13. 2022

밤의 카페테라스 12

12.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어느덧 밤의 카페에 가지 못한 지 두 달이 넘었다. 영훈을 보지 못한지도, 김과 카페에서 만나지 못한지도 두 달이 넘은 셈이다. 형수가 나올 때까지는 영훈이 카페를 지키고 있을 테니까 주말 아침 늦게라도 카페에 가볼까 생각도 했지만, 이마에 내리쬐는 아침 햇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골목길을 걸어가는 건 상상만으로도 진땀이 났다.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아침의 카페 방문을 미루고 미루었다. 이러다 겨울이 될 때까지 카페에 못 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싶으면서도 그렇게 되어도 별수는 없겠다는 체념까지 미리 하기도 했다. 여름이 막바지에 이르고 밤공기가 제법 선선해질 즈음이 되어서야 문득, 밤의 카페가 사라진 건 아닐까, 다시 가보려 해도 그런 곳은 어디에도 없는 거 아닐까, 서운하고 슬픈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렇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받아들이는 것밖에 더 있겠나, 어쩔 수 없지,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이 되어서야 김을 만났다. 점심시간에 도서관 서가에서 책을 뒤적이다 마주쳤다. 김이 종이컵에 믹스 커피를 타왔고 운동장 옆 나무 그늘에 나란히 앉았다. 샘, 카페는 잘 있어요? 김에게 물었다. 김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네? 샘도 요즘 카페에 안 가세요? 서로 어리둥절해 하며 얼굴을 마주보다가 아아, 알게 되었다. 나도 김도 카페의 근황을 모르고 있었다. 샘은 언제까지 가셨어요? 전 여름 되면서 잠이 늘어서, 일어나면 아침이고 또 일어나면 아침이고 해서 못 간 지 몇 달 됐어요. 김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몇 번 나를 찾긴 했는데 어느 순간 흐지부지, 굳이 새벽마다 카페까지 걸어가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단다. 아, 그러셨구나. 카페는 잘 있나 모르겠네요.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잠은 잘 와요? 김이 싱긋 웃었다. 뭐 그럭저럭. 그러더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비밀을 털어놓듯 속삭였다. 샘, 저 그 아이 꿈 또 꿨어요. 

  거리에서 아이를 만났다고 했다. 사람이 아주 많은 명동이나 을지로나 뭐 그런 번화가였는데, 아이는 그 사이에 키가 더 컸고 얼굴에 각이 생겼고 누가 봐도 듬직한 어른 같아 보였다. 김과 눈이 마주친 아이는 샘, 부르며 성큼성큼 걸어와 꾸벅 인사를 했다. 잘 지내나 보네, 아는 척을 했더니 아이는 여자 친구도 없고 뭐 맨날 알바만 하고 있어요. 이거 너무 한심하지 않아요? 너스레를 떠는데, 제법 여유도 있고 넉살도 좋아서 어디서든 제몫은 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단다. 잘 지내, 건강하고.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더라구요. 좋은 눈물이요. 슬프거나 아프거나 하는 거 말고 그냥 잘 지내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 같은 거요. 말을 마친 김은 가만히 종이컵 안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 

  샘은 어떠세요? 샘과 카페에서 만나면서도 샘께는 아무것도 못 여쭤봤어요. 김이 내 눈을 바라보았다. 저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되물었더니 김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아뇨. 특별히 여쭤보고 싶은 건 없었어요. 네, 없어요. 그냥 그 카페에서 만나서 좋았어요. 나도 마주 웃어 보였다. 저두요, 저도 샘을 만나서 좋았어요. 덕분에 잘 지나간 것 같아요.     


  그날 혹은 그 다음날일까. 오랜만에, 눈을 뜬 후에도 기억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었다. 10년 전쯤 내가 살던 아파트의 뒷문 쪽 정류장이었다. 오지 않는 마을버스를 얼마나 오래 기다린 건지 손가락이 얼음처럼 차가워졌고 발가락 끝에도 감각이 없었다. 하늘은 차츰 어두워지고 건물들의 윤곽이 검게 내려앉았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른 채 막막하게 앉아 있는데 저쪽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게 느껴졌다. 서서히 다가오는 그 사람은 얇은 목이 추워 보였고 마른 어깨의 윤곽이 눈에 익었다. 그 사람 역시 버스를 기다리는 듯 정류장 표시를 한 번 보고는 도로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나를 등지고 섰다. 퍼머가 풀린 얇은 머리카락, 엄지발가락 부분이 튀어나온 낡은 구두, 손잡이 끝부분의 실이 풀린 검은 가죽가방. 어느 순간 나는 그 사람을 알아보았다. 아, 이런, 엄마였다. 10년 전의 엄마. 아직 머리카락이 완전히 하얗게 새지 않은 엄마. 손으로 윗배를 꾹 누르지 않고도 서 있을 수 있고 밥을 반 공기 넘게 드실 수 있었던 엄마. 멀리서 형체만 보고도 한눈에 딸을 알아보던 엄마. 

  엄마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엄마라고 불러도 될까. 부르는 순간 그림자처럼 스윽 사라져버리는 건 아닐까. 내가 10년 전의 엄마를 부르면 현재의 엄마는,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린 우리 엄마, 뜨거운 물을 부어서 묽게 만들어야만 죽이라도 몇 숟갈 뜰 수 있고, 한참 얼굴을 보고 있어야 딸이라는 걸 비로소 알아채는 우리 엄마는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서, 차라리 이게 꿈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건 꿈이 맞다, 꿈이로구나. 내가 잠 속에 있는 거구나. 엄마는 내게 78번 버스가 여기 서냐고 물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78번 버스가 전철역으로 가는 게 맞냐고 다시 물었다. 나는 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디 다녀오시나 봐요. 엄마가 대답했다. 딸네 집에, 딸이 여기 살아요. 뒷문 쪽에서 버스 타려니까 잘 모르겠네. 그리고 다시 버스가 다가올 도로 저쪽을 향해 섰다. 

  그 순간 기억이 났다. 그때 엄마가 얘기한 적이 있었다. 나 지난번에 여기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말야, 버스 기다리다가 여기가 맞나 싶어서 어떤 아줌만지 아가씬지, 암튼 거기 있던 사람한테 물어봤거든. 근데 그 여자 좀 안됐더라. 꼭 너같이 생긴, 너보다 좀 나이는 든 것 같은 여자였는데, 나한테 어디 다녀오시냐고 묻더라구. 그래서 딸네 집에 갔다 온다고 했더니 ‘아주머니 딸은 참 좋겠어요, 아주머니 같은 엄마가 계셔서’ 그러는데……. 그 여자는 엄마가 없는지 아님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좀 울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엄마가 없다고 생각하고 보니까 괜히 좀 안됐더라구. 그때 나는 아무 느낌 없이 건성으로 그런가 보네, 그 여자 안 됐네, 대꾸했었는데 그게 나였다니,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니. 버스에 오르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말해보았다. 아주머니 딸은 참 좋겠어요, 아주머니 같은 엄마가 계셔서. 버스 창을 사이에 두고 엄마와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지만 주변이 어두워서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났을 땐 이미 날이 환하게 밝은 후였다. 베개 맡까지 비쳐드는 햇빛에 눈이 부셨다. 그때 엄마가 그 얘기를 할 때까지만 해도 난 그저 다행이다, 난 엄마가 건강하게 계시고 멀리까지 딸을 보러 오실 수도 있으니까, 생각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는 영원히 건강하고 영원히 내 걱정을 하며 언제까지나 나를 찾아올 수 있을 거라고 당연하게 믿었다. 엄마가 이렇게 마르고 약해질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엄마의 말을 듣고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 여자가 미래의 나일 거라고도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왜 나는 이제서야 알게 된 걸까. 엄마가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 못하게 된 후에야 뒤늦게 깨닫게 된 걸까.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10년 전, 아니 5년 전, 아니 지난겨울이라도. 엄마가 계셔서 언제나 나는 참 좋았는데, 엄마가 계셔서 나는 참 좋은데, 한 번도 말하지 못했다. 혼자 골똘히 지금이 아닌 미래에 먼저 가서, 여기 아무도 없는 것 같다고, 아무도 없으면 어떡하냐고 지레 슬퍼하고만 있었다. 그러느라 지금을 제대로 살피지도, 살아내지도 못했다. 시간을 흘려보낸 건 나다. 모든 걸 지나가게 만들고 잊혀지게 만든 것도 나다. 내가 어리석었다. 어쩌면 시간은 그저 직선으로 흘러가는 게 아닌지도 모르는데 나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시간은 때로 물결처럼 휘어 감기고 둥글게 뭉쳐서 별처럼 빛나는 건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모두 그 틈새에서 만나는 거라서 그래서 시차를 두고 서로를 알아보고 뒤늦게 깨닫게 되는지도 모르는데. 10년 전의 엄마와 오늘의 내가 만난 것처럼 어쩌면 내일의 나는 또 다른 시간의 엄마를 만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언젠가 엄마가 내 곁에 없는 날이 오겠지만 그렇다고 엄마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되돌릴 수 없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모든 게 끝나는 것도 아니고 애초부터 없었던 게 되는 건 더욱 아니다.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차원의 시간과 공간에서라도 인연은, 기억은, 마음은 이어진다. 

  벽 쪽으로 돌아누우니 햇빛 속에서 십자수 액자가 어두컴컴한 그늘처럼 보였다. 온통 푸른 어둠뿐이라 그 속에 어떤 풍경이 있는지 알아볼 수 없었지만 가까이 다가가 찬찬히 들여다보면 저기 마을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밤하늘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거다. 어두워지면 희미하게 별이 빛나는 것을 알게 될 거다. 보이지 않을 뿐, 별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희미하게라도 언제나 머리 위에는 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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