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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븐클라우드 May 12. 2022

밤의 카페테라스 11

11. 아침의 카페

  결국 그 그림은 내 차지가 되었다. 요즘엔 거의 사라진 십자수 가게를 찾아 헤매다 동네 후미진 가게에서 겨우 밋밋한 하얀 액자를 구해 끼워 넣었다. 하얀 벽에 걸린 짙푸른 색 풍경이 낮에는 생뚱맞아 보였지만 불을 끄면 검은 어둠 속에서도 십자수 그림이 희미하게나마 빛을 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새벽에 잠이 깨면 나도 모르게 제일 먼저 십자수 쪽을 보게 되었다. 거짓말처럼 밤하늘이 스르륵 움직이며 활짝, 꽃송이 같은 별이 열리고, 반짝, 자잘한 빛이 부서졌다. 마을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잠겨 있지만 하늘은 깨어 있고 별들도 지켜보고 있다. 그림 속 마을 사람들을 상상해보았다. 누군가는 촛불을 켜고 물을 끓이고, 누군가는 주섬주섬 옷을 입으며 일할 채비를 할 거고, 누군가는 그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해 하늘을 골똘하게 바라보고 있을 거다.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머리 위의 하늘은 춤추듯 부드럽게 움직이며 어둠 속에서 사람들을 어루만져주고, 세상에서 제일 외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쨌든 저 풍경 속에서 함께 있겠지. 

  카페에 도착하는 시간이 조금씩 느려졌다. 전에는 4시 반, 4시 40분, 어쨌든 5시 전에 카페에 도착했는데 침대에서 미적거리며 액자를 바라보다 보니 몸을 일으키는 시간이 5시가 넘을 때도 있었다. 여름이라 해 뜨는 시간도 빨라져서 이제 일어나볼까 생각할 때 이미 창문이 훤하게 밝아오기도 했다. 어두운 밤길을 종종걸음 치며 카페에 도착하던 때와 달리 날이 훤히 밝은 후에 도착하는 카페는 뭔가가 달랐다. 나는 밤의 카페가 아니라 아침의 카페에 온 거였다. 이미 대학생은 수건을 두르고 화장실에 들어간 후였고 노숙자 여자는 여행용 가방을 들고 거리 저쪽으로 사라진 뒤였다. 아니 어쩌면 노숙자 여자는 지난밤에 여기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나는 몇 달간 고개를 숙인 채 그림의 빈칸을 메우고 윤곽선을 따라 그리는 데 정신이 팔려서 화장실 벽 그림자 주변을 살피지 못했다. 어쩌면 여자는 이미 오래전에 이 카페를 떠났는지도 모른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며칠을 연거푸 아침이 되어서야 카페에 도착했고 여자를 만나지 못했다. 왠지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진 것처럼 마음이 안 좋았다. 

  아침 햇살이 비치는 카페에 도착한 나는 출근길에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가는 사람들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영훈과도 제대로 인사하기 힘들었다. 영훈아, 안녕? 어 그래, 뭐 줄까? 아메리카노 큰 컵으로. 가져갈 거지? 어, 가져갈 거지. 뭔가 한 마디라도 물어볼까 싶으면 어느새 내 뒤에 줄을 서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늘 커피를 받고 수고해, 한 마디만 건네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김을 못 본 지도 꽤 되었다. 내가 왔을 땐 이미 카페를 나선 후인 것 같았다. 어느 날엔가는 작정하고 새벽 4시에 알람을 맞춰 두기도 했다. 내일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꼭 밤의 카페에 도착하리라. 하지만 막상 알람이 울리자 굳이 억지로 카페에 갈 필요가 있나, 카페가 의무는 아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어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동안 5시가 훌쩍 넘어버렸고 이미 아침이 되어 버렸다. 

  밤의 카페에 가야한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하게도 눈을 뜨는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4시 37분, 4시 49분, 5시 13분, 5시 26분, 6시 27분……. 잠깐, 6시 27분? 순간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이건 카페에 들르는 건 고사하고 출근 준비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이다. 정신없이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고 학교로 뛰어가며 내일부턴 꼭 알람을 두 개씩 맞춰 두리라 결심했다. 다음 날도 알람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몸은 찌뿌드드했고 눈은 쉽게 떠지지 않았다. 아, 꼭 출근해야 하나, 출근 안 하고 누워 있으면 안 되나. 베개에 머리를 묻고 짜증을 내다가 순간 깜짝 놀랐다. 지금 뭐야, 내가 지금 더 자고 싶어서 투정 부리는 건가? 이런 게 얼마 만인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새벽에 갑자기 잠 밖으로 튕겨져 나와 혼자 오들오들 떨면서 제발 잠 속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혼자 깨어있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바랐던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뜨기 싫다고 투정 부리고 있다니,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설마 잠이 돌아온 건가? 왜? 어떻게?

  믿기지는 않았지만 새벽에 깨지 않게 되었다. 알람이 울리고도 한참 몸을 비틀고 귀를 틀어막다가 겨우 알람을 끄고, 다시 두 번째 알람이 울린 후에야 일어나는 날들이 이어졌다. 눈을 뜨면 이미 방 안은 여름 햇살이 창문 반대쪽 벽까지 환하게 비추고 있었고, 급기야는 창에 블라인드를 내리고 잠을 청하게 되었다. 출근 준비에 급급하다 보니 영훈에게 들르지 못한 지도 거의 한 달이 넘었다. 작정하고 오늘은 일찍 일어나야지 생각해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왠지 미안한 마음에 퇴근길에 카페를 찾아가 보았지만 아직 오후 햇살이 환하게 비치는 카페는 밤의 카페와는 완전히 다른 장소였다. 형수로 짐작되는 여자가 씩씩하게 알바생들을 진두지휘하고 있었고 유모차를 끌고 온 엄마들, 노트북을 펼쳐놓은 젊은 남녀들이 카페 자리를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겨우 화장실 옆 노숙자 여자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혼자 앉아 있는 게 쑥스러워서 괜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척 혹은 바쁜 일과 중에 잠깐 짬이 난 척,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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