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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븐클라우드 May 10. 2022

밤의 카페테라스 9

9. 노란 잠수함, 밤의 구조선

  주섬주섬 짐을 챙겨 들고, 먼저 일어나 문간에서 기다리는 김과 함께 카페를 나서다 문득, 김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불쑥 김에게 말하고 말았다. 저기, 샘, 괜찮으시면 이 그림 샘께 드려도 될까요? 말을 꺼내는 순간부터 후회하기 시작했다. 김과는 안 그래도 요즘 좀 어색한데 난데없이 십자수를 주겠다고 나서다니,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이미 꺼낸 얘기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서 말이 더 두서없어졌다. 아니 뭐, 그냥 편하게 거절하셔도 되는데 혹시 마음에 드시면 드리고 싶어서요. 부담 없이 편하게, 그냥 아니면 아니라고 하셔도 돼요. 내가 허둥대는 동안 김은 가만히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만에야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더니 김이 비로소 대답했다. 주셔도 되고, 선생님 뜻대로 하시면 저는 좋아요. 달라는 얘긴지 거절하는 건지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멍하니 김을 바라보았더니 김이 웃으며 다시 한번 말했다. 선생님 좋으실 대로 하시면 저도 좋아요. 집으로 돌아오면서, 거절이든 수락이든 아무튼 김은 친절한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섣불리 한쪽으로 단정 짓지 않으면서 내게 여지를 준 셈이다. 더 생각해보고 나은 쪽으로 결정하기를 바란다는, 나도 배려하고 자신도 배려하게 만드는 현명한 대답이로구나. 

  5월 마지막 주, 김에게 완성된 십자수를 보여주었다. 김은 한참 들여다보더니, 정말 바다 같네요, 좋아요 샘, 칭찬해 주었다. 그러고는 완성 기념으로 차를 사겠다고 했다. 이미 각자 커피를 마신 후였지만 다시 카페 라떼와 재스민차를 시키고 십자수를 테이블에 펴놓은 채 마주 앉았다. 이렇게 거꾸로 보니 더 물결 같아요. 김이 말했다. 별과 나무, 지붕의 윤곽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져보고 뒷면의 까끌거리는 매듭도 조심스럽게 다듬었다. 차를 거의 다 마실 즈음 김이 얘기를 꺼냈다. 

  제가 이 카페를 발견한 건 거의 1년? 작년 봄부터였으니까, 그러네요, 벌써 1년도 넘었네요. 근데 잠을 못 잔 건 한참 됐어요. 혹시 샘도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제가 가르치던 학생이 그 학교로 전학을 갔거든요. 친구들한테 중간고사 끝나고 놀러 오겠다고, 체육대회 같이 못 뛰어서 아쉽다며 자기 몫까지 열심히 뛰어 달라고 신신당부하고 갔는데……, 모르겠어요. 그 아이가 맞는지 어떤지도, 어떻게 되었는지도. 굳이 명단을 확인하고 그런 건 차마 할 수 없었어요. 어느 쪽으로 확인하든, 어느 쪽이든, 뭐랄까, 그 아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너무 잔인한 일이잖아요. 어떤 것도 다행인 건 없는 상황인데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 자체가 너무 무례한 것 같아서,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못했어요. 결국엔 아무것도 못한 거죠……. 

  그 배를 탄 아이들 전부가 전학 간 그 아이일 수 있었고, 그 아이 같았고, 그 아이였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김은 어느 순간부터 늘 같은 꿈을 꾸었다고 했다. 창문에 달라붙어 있던 하얀 그림자들, 물결에 휩쓸리기 전 하늘을 보며 유리창을 힘껏 두드렸을 손바닥들. 가끔은 뺨을 어루만지는 선뜩한 손길을 느끼며 꿈에서 깨어나기도 했다. 그런 새벽이면 두 번 다시 날이 밝지 않을 것처럼, 영원히 밤이 계속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단다. 그 나이의 아이들, 그 다음 , 그리고 그그 다음…… 나이의 아이들까지 졸업을 했지만 꿈은 계속 찾아왔다. 한동안 깊고 고른 잠을 잘 수 있어서 이제 괜찮은 건가 싶다가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무섭게 느껴져서 다시 잠을 이룰 수 없었고 그런 새벽이면 또다시 하얀 손바닥들이 눈앞에 무수한 손자국을 남겼다. 불을 꺼놓고 잘 수가 없어서 스탠드와 조명등을 여러 개 밝혀두었지만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은 늘 어둡기만 했다. 그래서 차라리 누워 있지 말고 일어나자, 밖으로 나가자, 누구라도 만났으면 좋겠다 싶어서 무작정 헤매다가 이 카페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때, 한밤중에 캄캄한 어둠 속에서 카페가 노랗게 불을 밝히고 있는데, 정말 그 느낌은 기적 같았어요. 뭐랄까, 무슨 오징어배 같았달까. 김이 푹 웃음을 터뜨렸다. 기가 막히죠? 근데 정말 오징어배 같은 느낌이었어요. 바다 밑이 깜깜한 어둠 속이 아니라 희미하더라도 빛이 있었으면 좋겠다, 심해어나 잠수함이나 노랗게 함께 해주는 빛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계속하고 있다가 이 카페를 만나서 그럴 수도 있어요. 어쨌든 너무 반가웠어요. 마음이 놓이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니까요.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이 카페가 그런 것 같기는 해요. 이 카페를 발견했을 때 그게 정말 그림 속에 나오는 풍경 같더라구요. 이게 진짜인가, 내 눈에만 보이는 건 아닌가, 뭐 그런. 막상 문 열고 들어섰을 땐 무슨 대피소나 기차역 대합실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요. 김도 따라 웃었다. 맞아요, 대피소나 임시보호소 같기도 해요. 근데 그 느낌도 좋아요. 그런 거 있잖아요, 커다란 구조선 같은 거. 호화 여객선은 아니니까 푹신한 매트리스나 거위 털 베개 같은 특급 서비스는 제공하지 않지만 그래도 풍랑이 거세지면 파도치는 바다에서 건져 갑판에 올려주는 거예요. 급한 대로 담요도 주고, 따뜻한 물도 주고, 풍랑이 조금 잠잠해질 때까지, 뭐 가능하다면 가까운 항구에 닿을 때까지 태워주는 거죠. 김의 말이 제법 그럴듯하고 근사하게 느껴졌다. 좋네요, 구조선. 이 카페가 정말 그렇게 느껴질 때도 분명히 있었다. 잠 못 이루는 사람들, 무서운 꿈을 꾸고도 혼자 있어야 하는 사람들, 갈 곳 없는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 영훈이 말대로 이 카페가 나름 좋은 일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런 얘기를 하면 영훈이가 더 의기양양할 테니 절대 말하지는 않을 거지만. 

  그리고 저, 얼마 전에 꿈도 꿨어요. 김이 몸을 앞으로 기울여 비밀 얘기하듯 속삭였다. 그 아이가 찾아왔어요. 중간고사가 끝났으니까 약속대로 왔다고, 체육대회는 괜찮았느냐, 자기 대신 누가 공격수를 했느냐, 계주는 몇 등을 했느냐, 꼬치꼬치 묻더라구요. 어딘지 모를 교복을 입고, 새 운동화를 신고, 이상하게도 가방은 들지 않았어요. 그냥 빈손이더라구요. 꿈에서도 너무 반갑고 왠지 울컥해서 한참 손을 잡고 인사하는데, 그 아인 저한텐 관심 없고 친구들 지금 어딨냐고, 친구들한테 가봐야한다고……. 그래서 같이 다른 친구들을 찾으러 교실로 갔는데……. 김은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가 한숨처럼 내쉬었다. 교실이 텅 비어 있었어요. 아무도 없이, 옆 반도, 그 옆 반도, 다 비어 있었어요. 책과 필통만 어지럽게 두고. 오늘 무슨 행사가 있나, 특강인가, 저도 당황해서 체육관으로 한번 같이 가보자고 했는데 그 아이는 오늘은 바쁘다고, 다음에 다시 놀러오겠다고 하더라구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 친구들한테 안부 전해주세요, 정말 그렇게 인사하고 계단을 내려갔어요. 김은 빈 커피 잔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고개를 숙였다. 아이가 사라진 후에야 갑자기 깨달았어요. 다른 친구들은 모두 졸업했구나. 그래서 교실이 비어 있는 거였구나. 김이 코끝을 만지며 조금 훌쩍였다. 울면서 깨어나긴 했지만 나쁜 꿈은 아니었어요. 아이가 다시 오면 뭐라고 말해야 하나 난감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이가 추워 보이거나 아파 보이진 않았거든요. 그래서, 어쨌든 그래서 샘, 저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카페 앞에서 헤어지면서 김이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샘, 그 십자수 저한테 안 주셔도 될 것 같아요. 저는 괜찮아요. 그땐 앞으로 영원히 편한 잠을 자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아이가……, 그 아이가 괜찮다고 해준 것 같았어요. 슬펐지만 무섭진 않았거든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슬프더라도 무섭진 않을 것 같아요. 무섭지는 않을 거니까 전 괜찮아요, 샘. 감사해요. 예쁜 그림이었어요. 감사해요. 나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손을 꼭 쥐어주고 집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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