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自身)을 되찾는 시간 1탄
프린세스메이커 마냥 나를 NPC처럼 길러주고 있는 동기들한테 어떤 날에는 '나 코딩 강사 할래요',라고 말했다가 다음날엔 '디지털 튜터 (=시니어들에게 디지털 기기를 알려주는 멘토)할래요',라고 내가 되고자 하는 직업을 쥐어짜 내면서 하나씩 반려당하고 재기안 하는 중이다.
그리고 곧 백수에게 후덜덜한 금액인 심리검사를 받았다. 상담센터 소장님이 기본상식 검사를 한다고 했는데 '우리나라의 국보 1호는? 사군자의 종류는? 이탈리아의 수도는?' 이런 질문들을 하셨다.
내가 치료를 받으러 간 정신과만 해도 어떤 시간에 가도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가급적 얼굴을 보는 게 실례인 줄 알아서 안 보려고 노력하지만 좇소기업 같은 곳을 다니다 보니 남일에만 관심이 많아져가지고는 음침하게 살펴 본 얼굴들은 정말로 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아무튼 무수한 우울증 환자 중 1인인 나는 심리상담 결과를 들으러 갔는데 결과는 평균 점수인 10점을 기준으로 이상, 이하로 나온다고 했다. 나는 '이해도' 점수에서 13점이 나왔는데 평균보다 한참 높은 점수라고 했다. 타인에 대한 배려심도 높고 공감도 잘하는데 그만큼 상대방을 무척 신경 쓰고 그 사람이 한 말에 대해서 의미부여를 한다고 했다.
내가 진단서를 첨부하여 병가 결재를 올리자 우리 부서 기록물에 있는 내 병가 신청서를 보고 우리 팀에 다른 팀원이 '이런 걸로도 병가를 올리네요'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또 직장내 괴롭힘 피해자 조치로 재택근무 한 기간에 나랑 싸웠다는 감사 업무를 하고 있는 H차장은 내가 업무를 제대로 했는지를 우리 팀 팀장님한테 따지듯이 물었다고 한다. 재택 기간 중에도, 또 병가를 쓰면서도 팀장님께 몇 번 연락이 오면서까지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제출한 결과보고서는 2차 가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S차장이 자신의 실적인것 마냥 나를 CC(참조)해서 나에게 다시 메일을 보냈다.
아, 이 이야기들을 전해 들었을 때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는가,
얼마 전 읽었던 책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글이다.
길은 사람의 다리가 낸 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이 낸 길이기도 하다. 누군가 아주 친절한 사람들과 이 길을 공유하고 있고 소통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내가 그 길에서 느끼는 고독은 처절하지 않고 감미롭다.
- 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