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런 일이 나한테만 생길까요?, 왜 나만 이렇게 힘든 걸까요?"라고내 인생에 대한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을 때 그분이 나에게 해주신 말씀은 "그란, 네가 주인공이라서 그래."였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흘러가는 인생을 항상 내위주로 생각하고 특별한 인생을 살길 바라 왔으면서정작 주인공이 느끼는 시련과 고난은 피하길 원했다. 늘 쉽고 빠른 길만 찾으려고 했다.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매일들이 모이고 모여서완성된다는 걸깨닫지 못했다. 시련이 없는 주인공의 인생은 지루하고 시시한 영화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나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우발적(=W팀장의 성씨를 따와서 그 팀장 발(發) 퇴사를 의미함) 퇴사를 하게 만든 W팀장은 한동안 잠잠하더니 본성을 숨기지 못하고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고 은은한 괴롭힘을 시전 중이다.사직서를 내면서 인사업무를 하는 B차장에게 부탁했던 이직확인서와 실업급여 퇴사 사유는 한번에 내가 원하는 대로 써주지 않았다.마지막까지 내가 왜 퇴사를 결심하게 됐는지 상기시켜주는 한결같은 회사였다.요즘에영화도 이렇게 만들면 B급 감성이라고 욕먹는다.
어쩌면 누군가를 괴롭히는 건 빌런이 할 수 있는 가장 한결같으면서도 쉬운 능력 일지도 모른다.내가 W팀장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하자 S차장은 나를 대신해서 목소리를 내주고 계셨던 노조위원장에게 W팀장 좀 그만 괴롭히라고 했다. 괴롭힘은 참 상대적이면서 빌런도 쉽게가져다 쓰면서 본인들의 역량(?)을 과소평가하는 단어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직이 시끄러워지는 게 싫다고 노조를 탈퇴한 남자인 S차장은 그 여자 노조위원장을 3년 전 사적인 술자리에서 했던 대화 내용을 바탕으로 성희롱 신고를했다.)
히어로몰 영화를 봐도 주인공이 그 편에 빌런을 물리쳐도 또 다른빌런이 다음 편에서 튀어나온다.영화와 현실이 비슷한 점은 끊임없이 빌런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영화와 다른 점은현실에선 인과응보는 기대하기 어렵고 가해자는 보호해주면서목소리를 낸 피해자가그곳을 떠나는결말이 많다.
미투 운동이 처음 시작됐을 때 우리 회사 기관장은 여직원들에게 선 넘는 발언을 한 뒤 "이런 것도 미투에 걸리는 거 아니야?"라는 말을 밥먹듯이 했다. 나는 묵직한 돌이 내 가슴에 앉은 것처럼 답답했다.억울하게 트집 잡혔다는의미를내포하면서가해자들에게이입하는 듯한묘한 뉘앙스와 피해자에 대한 배려 없음이 나를 화나게 했다. 한 번도 피해자였던 적이 없기 때문에 저런 말을 부끄러움 없이 할 수 있는 걸까? 티비에서 연예인들이 본인들끼리 장난으로 괴롭힌 뒤 "이거 완전 직장 내 괴롭힘이잖아"라고 말하는 것도 요즘엔 불편하다. 맞다, 나는 프로 불편러다.또 나는 피해자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피해자에 이입할 수밖에 없고 불편할 수밖에 없다.
가해자들이 꼭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본인들이 한만큼 돌려받길 바랐는데 너무 잘 사는 것 같아서 "하나님, 얼마나 더 큰 벌을 내리시려고 준비하시는 건가요...?"라는 철없는 말을 하기도 했다.
요즘 즐겨보는 드라마에서 학교에서체벌을 일삼는 선생님께 자신의 신념을 말하다가 눈밖에 나게 되고 신념을 굽힐 수 없어서 끝내 자퇴를 결심한 고등학생 친구에게 어머니가 해주신 말이 인상 깊었다. "ㅇㅇ아, 때로는 휘어질 줄도 알아야 해" 결국 그 친구는 자퇴를 하지만 부러져 봤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나는 휘어질 줄 모르고 언제나 꼿꼿하게 버티다 장렬하게 부러진다. 나에게 찾아온 모든 시련들과 상황에 의연하게 대처하고 어른스럽게 대처하는 법을 아직도 모르겠다.내가 어렸을 때 꿈꾸던 서른 살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말에 흔들리지 않고 내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모습이었는데 여전히 타인의 말과 행동에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어설픈 시간들과 부러진 경험들이 결국엔 나를 빚어가는 시간들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들을 버티고 살아내는 것이라고생각한다.
가수 김창완이 라디오에서 쪽지로 청취자에게 상담을 해준 내용이다.
나의 일상이 비록 어설프고 삐뚤빼뚤하더라도 내가 살아낸나날을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날은 조금 작고, 어떤 날을 유난히 크고, 어떤 날은 찌그러졌을지라도 다 같은 동그라미들이다.
나와 같은 괴롭힘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마지막까지 살아냈으면 좋겠다.매일을 살아낼 때마음속에기억했으면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