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금융의 마법, 유동화
오늘날 금융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유동화(Securitization)다. 지금의 금융이 이토록 다양하게 분화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한데, 성장 동력을 얻어서 막 꿈틀거리던 금융에 자유로움을 부여한 것이 유동화라는 개념이다. 그리고 성장동력과 자유로움을 얻은 금융은 끝을 모르게 뻗어 나가고 분화해서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금융에 자유를 부여한 유동화는 과연 무엇인가?
유동화는 말 그대로 유동성을 얻는 일을 뜻한다. 그리고 금융에서 유동성이라는 단어는 ‘지금 당장 현금을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니 유동화는 ‘지금 당장 현금을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특별할 게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 유동화가 현대 금융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우리가 유동화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드러난다. 과거에 유동화, 즉 당장 현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대상은 내 몸뿐이었다. 당장 현금이 필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돈을 빌릴 수 있는 곳, 예컨대 은행에 가서 돈을 빌리는 것뿐이었다. 내 몸은 앞으로 일을 해서 조금씩 돈을 벌 수 있는 자산이다. 그러니 내 몸이 앞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을 지금 당장의 현금으로 환산하는 일, 바로 ‘몸의 유동화’가 대출이고 금융이 발달하기 이전의 유일한 유동화 수단이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굳이 내 몸만 유동화의 될 수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유동화될 수 있는 대상의 조건은 ‘그것이 앞으로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가?’였다. 몸이 아니더라도 미래에 지속적으로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가치를 가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것을 담보로 당장 현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원리를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더 다양한 것이 유동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던 일에 유동화라는 딱지를 붙여서 이해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유동화를 사용하고 있었다.
1500년 경 지금의 독일 지역에 살고 있던 거상인 야콥 푸거는 광산업을 통해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많은 부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시기 로마에서는 교황청이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설에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교황청은 건설비를 충당하기 위해 야콥 푸거로부터 막대한 돈을 빌렸는데 이 돈을 갚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교황청은 면죄부 판매를 통해 수입을 얻고 있었는데 갚은 돈이 너무 커서 문제가 생기자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면죄부를 판매할 수 있는 한 교황청은 꾸준히 돈을 벌 수 있으니 당장 돈이 부족하다면 면죄부 판매를 통해 미래에 얻을 수 있는 돈을 지금 당장의 채무와 교환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교황청은 면죄부 판매 권리의 일부를 야콥 푸거에게 넘겼고 푸거는 교황청에 빌려준 돈을 받는 대신 면죄부 판매를 통해 지속적인 수입을 얻게 되었다. 물론, 알다시피 독일에서 푸거가 판매하기 시작한 면죄부의 끝은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 이야기에서 교황청이 한 일이 바로 유동화다. 교황청은 지속적인 현금을 창출할 수 있는 ‘면죄부 판매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그 권리를 유동화해서 당장의 현금을 확보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현금으로 빚을 갚았다. 이렇게 유동화는 오래전부터 알게 모르게 이루어져 왔다.
그렇게 드문드문 이루어지던 유동화는 금융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명확하게 정의되었고, 그만큼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유동화는 한 마디로 말해서 ‘미래에 경제적 효익을 지금 이 순간의 목돈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표현이 있다. ‘미래 경제적 효익을 창출할 수 있는 것’, 바로 자산이다. 그러니 유동화를 제대로 정의하고 나면 ‘모든 자산은 유동화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금융이 꽃피울 수 있었던 이유가 이 생각 덕분이다. 오늘날 금융에서는 모든 자산이 유동화되고, 유동화된 모든 자산이 다시 유동화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하나의 자산이 유동화라는 과정을 통해 파생되고 또 파생되면서 무수히 많은 금융자산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유동화는 한 마디로 말하면 미래 현금흐름을 지금의 목돈으로 전환하는 파생상품의 일종이다. 그리고 그 정의에 맞춰 유동화 대상은 자산이 된다. 그래서 모든 유동화 금융자산은 ‘자산 유동화 증권(ABS; Asset Backed Securities)’라고 부를 수 있다. 물론 이렇게만 부르면 복잡하지 않겠지만 금융도 나름의 전문 영역인 만큼 어떤 자산을 가지고 만들어 낸 유동화 증권인지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부르고 있다.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가 유동화 증권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한데, 기본적은 모든 유동화증권은 ABS이며 자산이 현금흐름에서 출발한다는 점만 이해한다면 복잡하게 생각할 일은 없다.
자산으로 부동산을 사용했다면 MBS(Mortgage Backed Securities) 그 부동산이 빌딩과 같은 상업용 부동산이었다면 CMBS(Commercial Mortgage Backed Securities), 은행이 가지고 있는 여러 대출, 채권 상품에서 만들어지는 현금흐름을 통째로 묶어서 사용했다면 TRS(Total Return Swap), 그 외에도 매출채권을 유동화한 상품, 신용카드 대금을 묶어서 만든 상품 등 세상에 있는 모든 자산은 각각의 이름을 가지거나, 혹은 가지지 않은 상태로 유동화되어 새로운 금융자산이 되기 시작했다.
그중 CDO(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라는 자산이 있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종류는 크게 개의치 않고 수많은 대출 상품을 묶어서 유동화한 것을 말한다. 은행은 주택담보대출을 포함해 다양한 대출을 판매하다 보면 건전성에 문제가 생긴다. 대출을 무작정 해주다가 충분히 상환되지 않고 부도가 나는 증권이 늘어나게 되면 은행도 파산할 수 있다. 그래서 리스크 관리 목적 상 적정 수준에서 대출을 제한하게 되는데 은행 입장에서는 고객을 더 늘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고객이 대출을 받겠다는데, 그리고 대출을 해주고 나면 예대마진으로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는데 가능한 더 받고 싶은 게 당연하다. 이때 은행이 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쌓여 있는 대출을 묶어서 유동화하는 것이다. 제3의 금융회사에 대출을 통해 미래에 얻을 수 있는 원리금 상환액을 넘기고 목돈을 받아낸다면 지금까지 만들어 낸 대출 계약의 고객들은 유지하면서도 목돈을 바탕으로 새로운 대출을 통해 고객을 늘릴 수 있다. 고객이 늘어날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매출도 늘어나서 더 큰 규모의 은행이 되고 인지도도 높아진다. 대출 계약의 우량함을 입증한다면 제3의 금융회사로부터 추가적인 이익도 요구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은행이 대출을 묶어서 만들어 낸 유동화 증권이 바로 CDO다.
실제 과정은 조금 더 복잡하지만 단순히 보면 대출을 묶어서 넘기고 현금을 얻어낸 것이다. 그런데 CDO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CDO도 결국 자산이다. 그러니 은행으로부터 CDO를 얻어 낸 제3의 금융회사, 대개 투자은행이라고 불리는 거대 은행은 CDO를 묶어서 다시 CDO를 발행하게 된다. 묶여 있는 것을 다시 묶기도 하고, 풀기도 하고, 혹은 일부를 떼어서 다른 것과 섞기도 하면서 CDO는 점점 더 복잡한 CDO가 된다. 물론 계속해서 유동화되는 과정에서 이익이 여기저기 퍼지고 모든 금융 회사의 매출도 늘어나게 된다.
총이익이야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그걸 섞어서 주고받는 과정에서 매출은 거품처럼 늘어나게 된다. 마치 파티가 열린 것처럼 유동화 증권이 다양하게 분화되고 재생산되는데 이 일이 2000년대 초반부터 엄청나게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렇게 찢고 다시 붙이며 수차례 금융자산을 더 파생시키다 보면 아무리 전문가라고 해도 그 상품이 가진 실질적인 위험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금융 리스크는 애초에 전문가도 쉽게 예측하기 어려운 영역인데 리스크의 기초가 되는 상품이 복잡한 과거를 가지고 얽혀 있다면 당연히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 된다. 그저 수익이 나고 있으니 파티를 즐길 뿐이다. 그리고 그 많은 증권의 출발점이 되었던 기초자산,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의 부실이 누구도 모르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없이 분화되어 있던 CDO 증권의 부실이 터져버린 게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물론 기본적인 원인은 최초의 기초자산이었던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의 부실이었겠지만 여기서 파생된 CDO, 그리고 거기서 다시 파생된 CDO와 같은 방식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던 것이 아니라면 누군가는 그 리스크를 인지할 수 있었을 것이고, 또 적절한 수준에서 부실 채권이 정리되고 안정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금융의 증폭기 역할을 하던 유동화는 금융의 부실도 증폭시켰고 그게 터지는 순간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파괴력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동화가 잘못된 일은 아니다. 분명히 유동화는 금융에 무한한 자유를 부여했고 우리는 모든 자산을 통해 새로운 자산을 창출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미래에 돈을 벌 수 있는 자원만 가지고 있다면 언제든 그것을 내가 원하는 시기에 현실화할 수 있게 되었다. 거기서 기인하는 효율성은 분명 우리 경제 성장에도 좋은 영향을 주게 된다. 다만 유동화가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 자체가 아닌 파생 거래를 통한 수익 추구, ‘투기적 목적’으로 변질되기 시작할 때 예측할 수 없는 리스크가 쌓여갈 수 있다는 점은 금융위기를 통해 뼈저리게 얻은 교훈이다. 유동화가 오늘날 금융이 가진 하나의 무기라면 우리가 할 일은 그 무기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 그리고 언제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인지하고 정해진 목적에 맞춰 조심스럽게 사용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