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건너는 징검다리
남이 되었다. 한 때는 가족보다 자주 만나고 가족조차 모르는 속내를 서로 나누는 사람이었다. 인생은 ‘불가근 불가원’ 이라고 하더니 세상의 섭리를 비켜나간 탓일까. 아무튼 우리는 어떠한 연유로 멀어졌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때 그일은 그만한 사건이 아니었다. 여느날과 같았고 늘 함께 다니던 스케줄이 한 번 어긋났을 뿐이었다.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서운함, 알수없는 불편함.. 미처 흘려보내지 못한 마음들이 차갑게 식어버린 서로의 겨울날 자연스레 얼어붙고 마침내 터져버린것이다.
예상치 못했던 날이 지나가고 그래도 긴세월 쌓아온 인연에 대한 예의와 오다가다 우연히 만나는 일도 비켜갈 수 없었기에 마주치면 짧게 인사를 건넸지만, 상대는 촛불처럼 흔들리는 고양이 눈을 뜨고 봤지만 못본 것 같은 제스처로 애써 고개를 돌리며 외면해버렸다. 이제는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외면에 대한 답례를 해야했다. 그리고 우리는 진짜 남이 되었다. 평생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살면서 나라고 비켜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무인도에 살고 있는게 아니라면 누구나 한번 쯤은 인관관계로부터 상처, 배신, 서운함, 억울함 같은 참을 수 없이 불편한 감정들을 겪게된다. 또 그순간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제일 애틋하고 안쓰러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서든 우리는 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한다. 때로는 상대의 최선이 나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고 나와의 이별이 될 수도 있다. 내가 믿었던 사람이라고 해서 친했던 사람이라고 해서 설령 사랑했던 연인일지라도, 상대가 당연히 나를 향한 선택을, 나를 위한 배려를 해주어야 하는 것만이 선善이 아니다.
나역시 그랬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가 나를 배려하지 않은 선택을 했을때 상처를 받고 상대와 멀어질 결심을 한다. 하지만 상대와 나는 한 사람이 아닌 각자서로 다른 주체이다. 어쨌든 그 상황에서의 선택은 상대의 몫이고 주체적인 선택이었을 뿐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다만 상대의 선택이 나에게 견딜 수없는 상처가 되었다면, 그 순간 나도 나를 위한 선택을하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과의 인연을 이어나갈 것인지, 끊어버릴 것인지 말이다.
그리고 과거의 내가 인연을 이어나가기 위해 인사를 건냈을 때 상대의 외면으로 어쩔 수 없이 남이 되었던 것은, 상대와의 인연이 애초에 내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싶다. 처음부터 내것이 아닌 것은 변하고 떠나가는 것이 순리라고 믿는다. 나와의 인연이 길든 짧든, 거기까지인 사람은 어떠한 연유로든 떠나간다. 인연은 강물처럼 흘러가고 그 순간부터 나와는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간다.
한동안은 괴로웠다. 아는 사람을 모르는 척 하는 것도,나와는 다른 환한 얼굴을 보는 것도, 어두운 얼굴을 보는 것도. 남이지만 여전히 남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은 공평하게 흐르고 시간속에서 우리 모두는 변한다는것을 믿는다. 상대방도 나도 그때 그시절의 존재가 아니라 세월이 우리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하게 한다고 믿기 때문에 이제는 서운함도 미움도 옅어졌다. 연연하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었다. 행복하든 불행하든 그야말로 남이사! 다. 우리의 인연은 때가 되어떠나갔을 뿐이다.
엊그제 우연히 마주쳤고 유유히 지나쳤다.
시절인연이었던 상대와 멀어지는 순간
내마음에 내려앉았던 돌덩이는
이제 거센 물살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되어
나를 더 좋은 세상으로 데려다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