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이분더 Dec 27. 2023

뭐 하는 사람이에요?




오랜만의 서울나들이다. 성수에 볼 일이 있어 길을 나섰다. 평일 서울 약속은 시작부터 분주하다. 아이를 맡아줄 사람을 섭외해야 하고 그 사이 간식과 식사 학원동선 등을 빼곡히 적으며 퇴사하는 사람의 인수인계서만큼이나 자세히 메모를 남겨두어야 한다. 다행히 친정엄마가 아이를 봐주실 수 있다고 해서 맘 편히 상경을 했다. 그런데 어디 이런 기회가 흔한가? 힘들게 주어진 평일의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이 날 하루동안 약속를 세 개나 잡았다. 오전은 아는 동생과 여러 팝업들과 맛집 탐방, 오후에는 고등학교 동창과 수다타임, 밤에는 연말행사에 참석했다. 그야말로 하루를 테트리스처럼 채워 넣고 자정 넘어 다음날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이날의 시작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아이의 우렁찬등교인사와 함께 개막됐다. 헐레벌떡 집을 나선 뒤 서울행 열차를 타기 위해 공원을 가로질러 역으로 향하는 길, 두 할머니가 눈앞으로 걸어가고 계셨다. 자유부인의 신나는 발걸음은 금세 두 할머니를 따라잡기 시작했고 이내 두 분의 대화가 내 귀에도 들리기 시작했다.


A할머니 : 딸 내 집에 사세요? 아나면 며느리넨가?

B할머니 : 아휴 딸래 집이죠. 며느리집이면 불편해~

딸이 L땡 다니다가 S땡으로 옮기는 바람에 여기로 오게 됐어요~

A할머니 : 아~ 그럼 사위도 S땡 다니나?

B할머니 : 네~ 맞아요. 그래서 뭐~ 딸래 집 살면서 손주들 보고 있죠.

A할머니 : 그렇구먼~ 우리도 애들이 S땡 다녀서~


두 분의 대화는 ‘S땡 다녀요?’에서 시작해 ‘S땡 다녀서~‘로 마무리 되었다. 마치 자녀들이 S땡만 다니면 다른 설명 필요 없이 통성명이 끝나는 듯했다.


듣다 보니 궁금해졌다. ‘우리 엄마는 나를 어떻게 소개하시려나?’, “oo전공해서 oo 하다가 지금은 oo 살아” 뭘 하는 사람인지는 과거완료형으로 끝나버린지 오래였고 지금은 어디 사는 누구로 소개될 뿐이었다. 의기소침해졌다. 가끔씩 나에게도 누군가 “뭐 하시는 분이신가요?” 라고 물으면 나도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난감해지기 때문이다. 주부라고 대답하기에 나는 너무 불량스럽고 ‘쓰는 사람’이에요. 라고 말하기에는 뚜렷한 업적이 없고 설명하기엔 장황했다.


<배려의 말들> 류승연



주변에 살아야 했던 이들이
주체가 되기 위해선
자신을 부르는 이름을
자신들이 정의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나를 부르는 이름, 나조차 나를 정의할 수 없다는 현실이 나를 아주 작은 존재로 만들어버리고 있었다.


한 아이의 엄마

한 남자의 아내

딸이자 며느리

여동생의 언니

형님의 동서

제부의 처형

누군가의 친구

커뮤니티 클럽장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

‘세계일주’를 꿈꾸는 사람

아들이 기안84처럼 자라길 바라는 사람

책을 출간하고 싶은 작가지망생

.

.

.

(그래서 뭐 하는 사람이냐면요…..)


“뭐 하는 사람이에요?”

다음에 또 누군가가 묻는다면 그때는 부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00 하는 사람이에요” 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그날의 나를 위해 오늘도 나는 나를 인터뷰하는 중이다.



이전 07화 올해의 하이라이트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