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내가 원하지 않아도 어색하거나 그리 친하지 않은 서먹한 관계인 사람과 대화할 일이 종종 생긴다. 분위기에 따라 대화를 나누지 않고 차분하게 넘어갈 수도 있지만, 때로는 숨 막히는 정적으로 무마하기에는 버거운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그 사람의 성향이나 성격을 잘 모를 때는 더욱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한참을 고민한다. 그럴 때는 큰마음을 먹고 아이스 브레이킹을 해야 하는데, 그중 내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마법의 질문이 있다.
MBTI가 어떻게 되세요?
이 짧은 질문 하나는 얼어붙은 얼음장 위의 따뜻한 햇살 한 줄기처럼 서서히 긴장을 풀게 만든다. 마치 서로의 마음에 작은 노크를 하듯, 느릿하고 조심스럽게.
MBTI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긴장이 조금씩 풀려갈 때며 마치 먼지가 가득한 오래된 도서관 속, 숨겨진 책 한 권을 발견한 기분이 든다. 첫 만남인데도 불구하고 각자의 MBTI를 공유하고 공통점을 발견하는 과정은 마치 우리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이야기 같다. 낯선 이가 읊어 주는 익숙한 언어, 꼭 내 마음을 읽어 주는 것만 같다.
MBTI 이전에 혈액형이 있었다. 4가지 유형으로 성격을 분류했던 혈액형보다 좀 더 세분화된 MBTI는 총 16가지 유형으로 성격을 설명한다. 이제는 심리테스트처럼 흔해진 검사이기 때문에 학교나 공공기관에서도 MBTI 검사를 활용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하나의 미신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흥미로운 점은 MBTI를 믿지 않는 MBTI도 있다는 점이다.
내 MBTI는 ENFJ다. 흔히 선도자라고 불리는 유형인데, 이타적이며 지도자적인 성향을 띠고 올바른 일에 앞장서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 단어들의 조합이 전부 나와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 낯설지도 않았다. 그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살피는 게 익숙했고, 불이 꺼진 방에서 누구보다 먼저 스위치를 찾아 켰을 뿐이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사는 게 '옳다'라고 생각한 내 신념이었다.
내가 해 오던 일들은 작은 다정함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어떤 유형의 희미한 빛들로 모여 있었다는 사실이 어느 순간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 빛은 아주 눈부시거나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어둠을 밝히고 두려움을 나누는 데에는 충분한 온도였으니까.
여러 일들과 사람들에게 치인 채 몸과 마음이 지쳐 돌아온 날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도 만나기 싫었고, 그저 혼자 있고 싶었다. 그리고 종종 '아... 나 내향형(I) 된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MBTI 검사를 몇 번이나 다시 해도 결과는 늘 변함없는 'ENFJ' 그대로였다. 나중에 다른 친구들과 대화하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진정한 내향인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언제나 늘 내향인이었기 때문에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MBTI 검사에서 사용하는 설문의 문항 구성 자체가 지나치게 단순해서 세분화된 의견이나 중간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비판적인 시각과, 과학적 접근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너무 신뢰하지 않아야 한다는 다수의 의견 또한 존재한다. MBTI는 과학적인 진단이 아니고, 완벽한 성격 정답지 또한 아니다. 내 마음을 설명하기 어려울 때, 나를 잘 모르는 누군가에게 스스로를 작게나마 표현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이럴 때 MBTI는 마치 나를 소개하는 작은 명함이 된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나긋하게 알려 주는 다정한 도구와 같이.
MBTI는 우리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비밀의 열쇠가 아닐까. 그저 세분화된 16가지의 유형일 뿐인데, 거기에는 우리가 어떤 식으로 세상을 보고 느끼고 살아가는지가 담겨있다. 때로는 'T'가 날카로운 논리의 가위로 세상의 불공정함을 자르고, 'F'는 다채로운 감성의 붓으로 아픈 마음을 덧칠하듯 어루만진다. 'E'는 찬란한 태양처럼 밖으로 빛을 퍼뜨리고, 'I'는 차분한 달처럼 조용히 우리의 새벽을 지켜 준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다른 유형으로 각자 살아가지만, 결국 하나가 되어 함께 살아가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가 MBTI를 좋아하고 재미있어하는 이유는, 진짜 성격을 파악하려는 목적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살아온 환경과 타고난 성격이 다른 서로를 조금 더 부드럽게 이해하고 싶어 하는 마음, 낯설게 다가오는 어색함 속에서도 이어지고 싶은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인연의 실은 짧아도, 길어도, 조금 엉켜도 괜찮다. 이어지고 싶다는 마음만 진심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나는 오늘도 새로운 사람 앞에서 마법의 주문을 꺼낸다. 그리고 그 질문 하나로 마법처럼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배워간다. 서로를 향한 다정하고 따뜻한 언어로.
여러분의 MBTI는 어떻게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