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아니, 어머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웃으라니요. 지금 웃음이 나올 상황이에요?'
툭 하고 던진 그 웃으라는 말 한 마디는 기괴했다. 아무리 상황을 분별하지 못해도 유분수지, 그 '왜 안 웃니'라는 말은 아버님의 죽음을 쌩 하고 뒤로 제끼고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비틀어진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라는 말이 아닌가. 너무 어이가 없어 실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무슨 뜻으로 그런 되지도 않는 말을 휘두르시는 건지. 그 말은 폭력이었다. 정인은 그 순간 지난 며칠이 생각났다. 어머니는 장례식장에서 자꾸 우는 정인을 나무랐었다. "넌 자꾸 왜 우니? 울지 마러." 옆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시어머니는 말끝을 뭉툭하게 잘라 정인 앞에 던졌다. 정인은 그 말 앞에서도 작아졌었다. 슬픈 마음을 억제시키는 어머니가 야속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어머니는 아버님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지 않았다. 몸에 붙어 있는 혹을 떼어 내고 후련해하는 것만 같았다. 정인은 끔찍한 생각이 들어 동욱에게 빨리 집에 가자고 했다. 어머니는 밥이라도 먹고 가지 그러냐고 붙잡다 말고 어서 가서 쉬라고 말을 바꿨다.
정인은 마음이 께름칙했지만 속으로 꿀꺽 집어삼켰다. 그런 얘길 누구에게 하겠는가. 남편과의 사별 후 바로 화기애애해지기를 바라는 시어머니의 진상을. 정인은 한동안 마음이 심란하고 울적했다. 동욱에게도 말할 수 없고 친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으니. 자기가 잘못짚은 것이길 바라면서 정인은 아버님의 안녕을 기도했다. '아버님, 그곳에선 평안하시지요. 그곳에서 예수님이랑 만나셨어요? 다른 누구를 만나셨어요? 누구를 만나든 아무 걱정 없이, 아무 눈치도 보지 말고, 마음 편하게 사시길 빌게요. 어떤 고통도 없고 미혹함도 없는 곳에서 매일 행복하시길 바랄게요. 가끔은 우리 사는 곳도 바라봐 주시고 우리 애기 크는 것 보시면서 웃으시길 바랄게요.'
꽃이 피고 어버이날이 왔다. 상황이 어떻든 도리를 지키는 걸 중요시하는 정인은 카네이션 바구니를 큼지막한 걸로 두 개 사들고 친정에 들렀다 시댁으로 향했다. 친정엔 부모님이 계시니 밥은 혼자 계시는 어머니와 먹기로 했다. 동욱과 아들과 함께였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샤브샤브를 사드리고 어머니댁으로 다시 갔다. 좁은 집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어머니는 사과를 담은 쟁반을 들고 안방 겸 거실인 큰 방으로 들어오셨다. "제가 깎을까요?" "아니, 내가" 어머니는 퉁명스럽고 짧은 말을 동그랗게 내뱉으면서 동시에 사과 껍질을 아주 얇고도 길게, 그리고 끊기지 않게 줄줄이 깎아내었다. 정인의 세 살 된 아들 지온은 콩콩 뛰어다니며 할머니가 주는 사과를 양손에 쥐고 아삭아삭 베어 물었다. 침묵 속에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손주의 귀여운 행동에 "고 녀석 잘도 묵네. 많이 묵어. 많이 묵고 얼른 크거라." 하면서 어머니는 입술을 양옆으로 잡아당겨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머니의 누렇고 주름진 얼굴과 확연히 다르게, 입술 속에 감추어진 이는 상아로 만들어졌다는 피아노 건반처럼 새하얗고 단단해 보였다. "나는 물렁물렁한 것보디눈 이렇게 아삭하고 딱딱한 것이 좋아." 뭐든지 씹어먹을 것처럼 딱딱한 걸 좋아한다고 누차 이야기하면서 어머니는 다 깎여나가고 남은 사과 양 옆구리를 우걱우걱 씹어 삼켰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첫 어절을 '옛날에'로 시작하는 어머니의 레파토리가 시작되었다. "아이구. 말도 말어. 옛날에 으뜩게 살었는지 알어? 내가? 내가 시부모를 모신 게 꼬박 이십 년이여. 근디 그 시부모가 을매나 고약한가 하믄 절대로 밥을 못 묵게 해. 밥 한 숟갈두 못 묵어. 그랴믄 그 두 냥반이 논에 나갔을 띠 얼른 부엌에 드가서 도둑 괭이마냥 몰래 묵어." "왜요? 왜 밥을 못 드시게 하셨어요?" "몰르지. 몰러. 히야. 그 냥반들이 을매나 고약한지. 며눌이 한나 있는 거 뵈기 싫여서 을매나 구박을 했는지. 내가 그르케 시집살이를 이십 년을 하구. 아이구. 맨날 배가 곯아서. 몰러 어뜨케 살었는지. 근디 더 희한한 게 뭔지 알어? 그 냥반들이 꼬옥 즈그 아들을 데리고 자. 그닝께 아들이 장가를 들었으믄 며눌이헌티 보내주어야 맞지. 근디 그 냥반들은 즈그 아들을 가운데다 끼고 잔다닝께. 그르케 했는디 으뜩케 애를 셋씩이나 낳았는가 몰러. 그냥 딱 세 밤 잤겄지. 아주 그르케 이상한 냥반들이었당께." 어머니는 같은 말을 또 하고 또 하셨다. 돌려도 돌려도 끝나지 않는 돌림노래였다.
그런데 그런 얘기를 듣고 있는 건 언제나 정인 혼자였다. 다른 형제들이 함께 있어도 어머니는 정인 앞에 앉아서 정인에게만 이야기했다. 아니, 어쩌면 다른 사람들은 못 들은 척을 하는 건지도 몰랐다. 남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정인도 어머니 한이 얽힌 지난 설움을 계속 들어주는 것이 고역이었다. 지겨웠다. 어머니 앞에서는 티를 낼 수 없어 꾹 참고 있었지만 집에 가는 차안에선 동욱에게 얘기했다. "아니, 왜 맨날 어머니 얘기를 나만 혼자 들어? 다른 사람들은 듣는 척도 안 하고 자기네들끼리 얘기하고 딴전 피우니까 어머니가 나한테만 계속 말씀하시잖아. 딴 사람은 몰라도 자기도 좀 들어. 어?" 그러면 동욱은 "어." 라고 한 음절로 대답했다. 그러고 다시 어머니를 만나면 지난 시추에이션이 반복되었다. 정인은 어머니에게 최대한 맞춰 주려고는 했지만 다른 형제들이 나 몰라라 하는 게 더 신경이 쓰이고 불편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이야기는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져 점점 더 풍성한 이야기로 보따리를 풀어내고 있었다. 정인에게는 전혀 중요하지도 않고, 전혀 재밌지도 않은, 시시콜콜하고 잡다한 이야기 보따리를. 어머니의 이야기 보따리가 커져감에 따라 어머니의 전화 횟수도 늘어났다. 내용은 콩나물 가격부터 병원 진료까지, 어제의 콩나물과 오늘의 콩나물 비교, 시장을 갔다 오는 모든 과정과 사람들과 주고 받은 말들, 병원을 가게 된 이유서부터 진료 시간과 의사 선생님과 나눈 대화의 모든 것,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해야 하는 역사가처럼 어머니는 모든 것을 하나하나 복기하며 상세하게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어머니의 얘기를 듣고 있자면 정인은 귀에서 땀냄새가 날 지경이었다. 지겨웠지만 계속 들어주었고 그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딸보다도 며느리인 자기를 더 믿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도록 그렇게 자신을 의지하는 것 같은 어머니를 냉정하게 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문제는 시매부를 대하는 어머니의 태도에서 비롯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