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에게는 두 명의 형님이 있었다. 한 분은 아주버님의 와이프, 그리고 또 한 분은 남편의 누나.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두 사람을 지칭하는 친족어가 같았다. '형. 님'. 형이라는 글자에 님이라는 존칭을 붙이는 아주 재미나는 호칭이었다. 정인은 국어사전으로 '형'의 뜻을 찾아보았다. '형'은 정인도 알다시피 한자로 '형 형'(兄) 자니까 고유어가 아니고 현대 국어의 '언니', '맏'에 해당하는 말로 쓰였을 것으로 논의된 바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둘 다 정인에게는 당연지사 손윗사람이지만 공교롭게도 호칭이 같아서 이 사람에게도 형님, 저 사람에게도 형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형국이었다. 형님이라는 호칭 자체가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하면서 불현듯, 혹시 한 사람을 불렀는데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하는 해프닝이 벌어진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뒤따랐다. 그것 참 난감하겠구나. 학교에서도 선생님이 따봉아! 하고 따봉이를 불렀는데 따봉이들 셋이 동시에 대답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그러나 정인이 우려했던 그런 경우는 생기지 않았다. 형님들 사이가 여간 어색한 게 아니었을뿐더러 같이 있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정인은 두 분의 형님 밑에 있는 가장 어린 아우였고 형님이 두 분이어서 좋았지만 둘이는 서로 사이가 데면데면해서 껄끄러운 상황. (정인은 형님들과의 그런 어정쩡한 분위기에 대해서 동욱에게 이야기해 주었고, 이 형님 저 형님 부르기가 번거로워 아주버님의 와이프를 형님이라 하고, 시누이는 누나라고 칭하기로 했다.)
결혼을 하고서 대다수의 며느리들이 앓게 되는 병이 있다. 일명 명절 증후군이라고, 이 병은 주로 우리나라에서 발병하며, 주로 명절을 앞두고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살짝 과장을 하여 병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병인 것은 아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같은 증상이 발현된다는 뜻이다. 신경을 곤두세우기 때문에 두통이나 신경통이 생기고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 명절 전부터 시작돼서 명절 연휴가 지난 후에도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문제의 원인은 여러 가지로 살펴볼 수 있는데 일단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는 서로 다른 문화 차이를 꼽을 수 있다. 며느리가 시댁에서 치러야 하는 과업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정도에서 지나치게 되면 곧바로 신경줄이 자극되기 시작한다. 여태껏 자기 방식대로 살아온 며느리에게 갑자기 선택의 자유가 없어지는 일은 크나큰 고통이 된다. 어머니의 방식에 따라서 며칠 전부터 음식 재료와 음식을 준비해야 하고, 자기의 의견이 묵사발되는 경우에는 하고 싶은 말이 굴뚝같아도 참아야 하며, 명절날에 한 시 빨리 친정에 가야 하는데도 시누의 가족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면 붙잡히는 일까지도 겪어야 하는 건 기본이다. 지금이야 세상이 참 좋아져서 명절이 되면 비행기 타고 딴 나라로 훌훌 떠나는 여행객들 꼬리가 공항 밖으로까지 이어지지만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정도 전만 해도 많은 집들의 분위기는 이랬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지만.
그래서 명절은 너도 나도, 며느리도 아들도 딸도 육체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다들 피곤하고 지치는 날이었다. 그러나 이런 피고니즘과 후유증이 잘 해소되지 않으면 신체적인 증상보다 무서운 것이 있었는데, 부부 간의 갈등과 불화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풍습이라 정인의 윗 세대들은, 특히 훨씬 더 많은 식구들을 건사해야 하는 맏며느리들에게는 명절 증후군 정도가 아니라, 울화병이라는 진단명이 있을 정도였다. 50년 전만 해도 사촌에 육촌까지 모였으니 음식 준비부터 뒷처리까지 몸 고생 마음고생은 말해 무엇하랴.
아무튼 이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17년 정도를 거슬러 가 있는 상태다. 명절의 풍습을 말하다 보니 50년 전을 끌어당겼지만, 17년 전에는 50년 전보다 이미 핵가족화 되었고 그래서 명절도 많이 간소해졌다 것을 잠깐 짚고 넘어가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인의 입장에서는 17년 전 그 당시, 50년 전의 풍습대로 명절을 치르고 있었다. 모이는 가족들은 어머니, 아주버님 가족, 시누 가족, 그리고 정인의 가족이 전부였지만, 문제는 위에서 언급한 기본적인 문화 차이에서 오는 손저림과 발저림에 있었다. 아이들도 어려서 많이 먹는 것도 아니었고, 어른들이야 일곱 명뿐인 건데도 어머니는 50년 전처럼 음식을 준비하길 원했다. 기본적인 밥과 국, 나물 네댓 가지, 홍어 무침과 갈비, 갈치 구이이 이런 것은 뭐 어느 집이든 하니까 그런대로 만족했다. 그러나 문제는 부침개였다. 정인의 친정에서는 세 가지 정도 하면서도 힘들다 힘들다 소리를 들어가며 전을 부쳤는데, 시댁에 오니 세 가지는 무슨, 여덟아홉 가지를 했다. "헉. 이렇게 많이 해요?" 하면 "이게 무어가 많아? 쪼끔씩 하는디. 요것도 안 묵고 어뜩케 해?" 하는 답이 돌아왔다. 정인은 첫 해에도 놀랐지만, 두 번째 해는 더 놀랐고, 세 번째 해는 더더더 놀랐다. 양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했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아주버님의 와이프인 형님이 그렇게 전을 많이 부치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걸 더 즐겼으며 전을 부칠 때는 "여보, 나가서 맥주 좀 사 와." 하면서 남편을 불러댔다. 그러면 옆에 있던 정인은 "아니, 자기가 사 와. 맥주만 사지 말고 애들 먹을 거 과자랑 아이스크림, 커피도!." 했고, 그러면 동욱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서 사 오라고 한 것들을 어김없이 잊지 않고 사 왔다. 동욱은 정인이 주문하지 않았던 막걸리까지 사 왔고 막걸리를 좋아하는 어머니는 "그랴, 한 잔 줘 봐. 쪼끔 입맛만 다시게꼬롬." 했다. 그러면 전을 부치는 노동 전야는 일터가 아니라 즐거운 화개장터가 되었고, "너도 좀 마셔라. 묵으면서 해. 따땃할 때 묵어야 맛나지." "자기도 마실 거야?" "어, 그래 먹지." 하며 주거니 받거니 술이 오가고 웃음이 뒤따랐다. 어머니는 그런 분위기를 좋아했다. 정인은 어머니의 얼굴이 발그레해지고 말이 더 많아지는 걸 지켜보았지만, 어머니나 형님의 기분에 상관없이 전 부치는 화개장터는 그만 끝났으면 했다. 그래서 화개장터가 끝날 때까지 저린 다리를 이리 펴고 저리 펴면서 전을 부치는 중간에 그곳을 벗어나 조카 둘과 아들이 노는 방으로 끼어들어갔다 나오곤 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명절 전날의 풍경이다. 명절 전날은 새벽부터 시작해 오후 4시경까지 음식 준비가 한창이었고, 4시 정도가 되면 유례없이 펼쳐지던 화개장터는 문을 닫았다. 정인은 집에 가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모두 함께 자길 원했고 그러면 정인의 아주버님 가족과 정인의 가족은 모두 좁은 공간을 나누어 잠이 들었다.
명절이 되면 정인의 마음속에 꽈리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아침을 간단하게 차려 먹고 나서 조금 지나면 어머니가 새로운 해물탕과 다른 반찬들을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알고도 모를 신경전이 시작된다. 형님은 흥에 겨워 맥주를 마시며 즐거워하던 명절 전날과 완연히 다르게 입이 댓발로 나와 있었다. 형님과 아주버님의 미묘한 속닥거림이 방 뒷켠에서 이루어지면, 형님은 그곳을 빠져나가기 위한 몸부림에서 지고 난 후였다. 어머니는 풍성한 해물탕을 위해 더 많은 재료를 사 왔고, 그러면 정인과 형님은 어머니를 도와 음식 준비를 해야 했다. "왜, 우리가 먹던 음식을 그대로 주지 않고, 새로 음식을 하시는 거예요?"라고 아무도 묻지 않았다. 정인은 몹시 불편했지만, 그런 얘기를 주저 없이 할 수 없었던 것은 자기보다 먼저 시댁 식구가 된 형님도 아무 말이 없었기 때문이고, 자기가 나섰다가 명절 분위기만 망가질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형님도 불편해 보이긴 했지만, 따로 얘기해 본 적이 없으니 속마음은 알 수가 없고, 그보다는 친정에 가지 말고 누이 가족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어머니의 말에 뾰루퉁한 것일 수 있었다. 정인은 그것도 그랬다. 누나도 시댁 식구들 중에서 시누이를 기다렸다가 식사를 같이 하고 오느라 저녁때가 되어서야 오는 것인데, 그러면 형님이나 자기는 계속 이렇게 시누이를 기다리느라 친정에 못 가야 하는가? 정인과 형님은 말은 안 했지만, 이 도미노 사태가 불공평의 끝에 있다는 것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니 왜, 시누이의 가족을 위하여 음식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 건가? 이미 전날에 고생고생해서 만든 음식이 있지 않은가? 아니, 그것보다도 해물탕을 미리 해서 가족들이 다같이 먹고 남겨서 주면 되지 않는가? 어머니는 해물탕 거리와 갈치를 꼭 따로 보관해 두었다가 사위가 오기 전에 새로 끓이고 지지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사위가 오면 차린 게 없다면서 해물탕을 아주 큰 그릇에 사위 앞에다 놓아주었다. 아무리 백년손님이라지만, 아니 왜 정인은 그런 차별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시누이 가족을 만날 날이 명절밖에 없으니 얼굴 보는 거야 좋지만, 왜 친정을 포기해 가면서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왜 시누이 가족이 와서 저녁만 먹고 9시면 일어나야 한다는 일정에 맞추어 도착하는 시간을 전화로 물어봐 가며 대기하다가 그 시간에 맞추어 완벽한 식탁을 거나하게 차려 놓고 다 먹으면 수순에 따라 과일을 깎아 대령하고 집에 갈 때는 음식을 바리바리 싸 주어야 하는 것인지, 이걸 앞으로도 계속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그렇게 명절날 저녁이 되면 전날과 사뭇 다른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그러면 집에 가는 차 안에서 정인의 목소리는 지붕을 뚫고 하늘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