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거짓말처럼 느껴졌지만, 어머니의 말은 사실이었다. 진짜로 가지 말라고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어머니가 그러라고 해도 정인은 사람이라면 도리를 지켜야 하는 거라면서 동욱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하지만, 동욱은 안 가도 된다고 했다. 그럼 식구도 얼마 안 되는데 누가 가는 거냐고 정인이 재차 물었다. 외삼촌, 외숙모와 자기 형만 참석한다고 했다. 정인은 이해가 안 갔다. 이모들도 다 안 가느냐고 물었다. 동욱은 그것까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갔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에 안 간다? 어머니는 본인의 친정 어머니인데도 안 간다? 어찌 그럴 수가 있지. 정인은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가 오판하고 계신 거라는 걸 얘기하고 싶었고, 대관절 그 이유가 무엇인지 듣고 싶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동욱의 외할머니가 화장실에서 넘어져 누워계신 지가 3개월이 넘었는데, 며느리라는 양반이 잘 챙겨주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집에만 처박혀 계시던 할머니가 갑자기 코로나에 걸렸는데, 그 며느리가 밖에를 들낙달낙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외할머니가 코로나에 걸렸겠느냐고. 그러니까 며느리가 코로나를 전염시킨 것이고, 며느리 때문에 당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거라고. 그 며느리라는 양반 때문인 거라고 했다.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외할머니를 돌아가시게 하려고 일부러 며느리가 코로나에 걸린 건 아니지 않느냐고 정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상황에 그 이유를 왈가왈부하는 게 겸연쩍어서... 그래도 이유가 어쨌든 어머니가 장례식장에 안 가시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이것만은 얘기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못 들은 척, 외할머니 앞으로 나오는 연금이 원래 본인의 주소로 되어 있던 걸 동사무소에 가서 알아보니까 며느리가 자기 집으로 바꾸어 놓았다면서 길길이 날뛰었다. 친정 어머니가 돌아가신 마당에 동사무소에 가서 현재 연금 수령지가 어디인지를 확인했다는 걸, 어머니는 며느리 정인에게 아무런 벽도 없이 대놓고 말하고 있었다. 정인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말문이 턱 막혔다. 어머니는 정인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돌림노래처럼 그 이야기만 계속하고 있었다. 그 여편네가 그 연금을 가로채고 있었다고. 안 그래도 언젠가부터 통장에 입금이 안 돼서 수상했는데 동사무소에 가서 알아보니 단번에 나오더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친정 어머니의 사인과 연금 수령지에 관한 의혹을 들춰내야 하는 긴박감과 분노에 벌벌 떨고 있었다. 그게 장례식 불참의 이유였고, 그런 비상식적인 이유를 며느리 정인 앞에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고 있었다. 정인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정인은 머리통의 반이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머리가 텅 비어 버린 느낌. 일부러라도 머리를 댕강 잘라내야 했다. 어머니의 말들을 머릿속에서 사라지게 하고 싶었고, 어머니의 존재 자체를 잊고 싶었다. 정인은 합리적이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납득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고,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관계를 차라리 끊고야 마는 성미였다. 어머니의 과거 여러가지 일들 가운데도 비합리적인 것들 투성이었지만, 그래도 가족으로 묶여 있으니 이해하려고 노력해 왔다. 동욱에게 어머니가 어떻게 자랐는지 물어보았었고, 동욱이 아는 건 거의 없었지만, 어머니와 그의 어머니와의 관계에서조차 사랑이 없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어렸을 때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에 진실된 사랑이라는 걸 모르는 거라고 생각했다. 꼭 연인 간의 관계가 아니라 부모 자식 간의 관계에서도 사랑은 '기브 앤 테이크'가 중요한 것인데, 어머니의 방식은 늘 일방통행이었기 때문이다. 그걸 사랑의 부재라는 관점으로 이해해 보니 어머니가 한편으로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서 노력했는데, 그동안의 노력이 한순간 머리뚜껑에 실려 날아가는 게 보였다.
정인은 이 마음의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했다. 동욱이 집에 들어왔을 때 어머니의 그런 말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동욱은 어머니가 자기한테 동사무소 얘기는 하지 않았다면서 당황해했고, 정인이 혼란에 사로잡힌 걸 보면서 미안해했다.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아무리 비정하다 해도 그런 짓을 벌일 수는 없다.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신 상황에 올케 보기 싫다고 어머니 장례식에 본인이 불참하는 것도, 자식들을 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하나님이 노하실 일이고, 하늘이 노할 일이다.
정인은 당분간 어머니의 전화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동욱은 그러라 했다.
그러고 며칠 후, 정인은 머리에서 어머니가 떠나지 않아 동욱에게 어머니에 대해 일어나는 반감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나간 일들이지만 동욱은 그 일들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방관만 하고 있었으므로, 이제는 솔직히 얘기를 해 달라고 했다. 동욱이 언제나 어머니를 감싸고도는 것처럼 늘 중립을 지키는 것도 이제 정인은 수용하기 어렵다고 했다. 어머니의 이상한 말과 행동들이 갑작스러운 게 아니라 오래전부터 그랬던 거 같은데, 결혼하기 전에는 어땠는지 물었다.
동욱은 이런 얘길 꺼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러니까 벌써 14년 전의 일인데, 장례식장에서 형이 자기를 밖으로 불렀다고 했다. 영문을 모른 채, 동욱은 밖으로 같이 나갔고 거기에 누나도 같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형이 말하길, 어머니를 정신과 같은 데 보내는 게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정인은 그래서 뭐라고 했냐고 물었다. 동욱은 자기는 그냥 가만히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럼 결과는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아마 그냥 그렇게 한 번 얘기 꺼낸 걸로 끝이었다고 했다. 왜 그랬냐고 물었다. 어차피 얘기해도 들을 양반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했다. 그래도 어머니한테 얘기를 꺼내보아야 했었지 않았냐고 다시 물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어머니가 가만히 있겠느냐고, 그 말 한마디에 흥분하고 곱씹고 되뇌고 집착하고 따지고 수도 없이 전화하고 길길이 날뛸 것이 분명했다고 했다. 그래서 무서워서 피한 거냐고 했다. 그렇다고 했다.
정인은 동욱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를 하면서도 한편으로 너무 괘씸했다. 14년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그전부터도 어머니는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뜻이고, 결혼을 한 이후에 이상하다고 여겼던 행동들에 정인이 혼란을 겪는 걸 알면서도 동욱은 그저 모르쇠를 일관했다는 뜻이 되었다. 정인은 가슴에서 불구덩이 같은 것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여태껏 모른 척을 해왔던 동욱은 비로소 배신자가 되었다. 이제 정인은 상황에 대한 이해가 완벽히 되었지만, 동욱의 태도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볼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어정쩡하게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동욱과 연결되어 있다는 이유로 어머니와의 관계를 유지했지만, 지금으로부터 어머니와의 관계는 끝났다. 더 이상 어떤 얘기도 듣고 싶지 않았고 하고 싶은 말도 없어졌다.
이제는 동욱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것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