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혜정 Jun 19. 2024

12화


12화



동욱은 원체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정인이 스물 여섯이었을 때, 동욱과 처음 만났던 중고등 종합학원에서도 동욱은 말이 없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저렇게 평소에 말을 안 한다면 수업 때는 학생들 앞에서 어떤 식으로 수업하는지 궁금해 할 정도로. 그래도 성실하기는 한지, 정인이 그 학원에 입사했을 때 동욱은 젊은 나이에 과장으로 있었다. 선생님들 중 40대 중후반이었던 도연쌤은 동욱이 말은 없어도 참 착하고 선한 사람이라는 건 자기가 장담한다면서 정인에게 한번 사귀어 보라고 부추겼다. 회식 자리에서도 선생님들은 동욱과 정인 사이에서 스스로 징검다리가 되려고 앞을 다투었고, 그럴 때면 정인은 그런 징검다리들에게 손사래를 치면서 "아이고!! 제 스타일이 아니라니까요!!" 하고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크게 X자를 그리곤 했었다.


그렇게 6개월 정도가 지나고 정인의 생일을 앞둔 초겨울의 어느 날, 정인은 동욱에게 전화를 받았다. 동욱은 바짝 긴장을 하고 있었고 떨리는 목소리로 생일을 미리 축하한다고 말했다. 정인은 고맙다는 말 대신에 웃음을 터트리면서 참 당돌하게 "아니, 제 생일은 어떻게 알았어요?"하고 따지듯 물었다. 동욱은 버벅거리며 "아, 제..제가 선생님들.. 생일.. 관리를 해서요오..." "아~ 그러세요? 그래서요?" "어..어.. 선생님 생일에 만나도 될까 하구요오.." "저를요?" "네에..." "왜요?" "아, 그게.. 제가.. 그러니까.. 음..어....." "알았어요!! 과장님, 그럼 어디서 볼까요?"


처음 데이트를 했던 날에도 동욱은 행선지를 정하지 않고 정인이 가고 싶다고 하는 식당과 카페를 졸졸 따라다녔다. 정인이 먹고 싶은 걸 같이 먹었고, 정인이 가고 싶은 곳은 데이트 장소가 되었다. 정인은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동욱이 도연쌤 말처럼 참으로 선하게 느껴졌다. "저건 좀 심하지 않아?" 하면 "맞아. 그래." 했고, "나 오늘 너무 힘들어."하면 "그럼 푹 쉬어."했다. 그 시절엔 내비게이션도 없었을 때인지라, 동욱과 경상도나 강원도 같은 장거리 여행을 갈 때는, 정인은 조수석에 앉아서 지도를 들여다보며 길 안내를 했고, 정인의 지시등에 따라 동욱은 군말없이 차분하고 편안하게 주행을 했다. 1년 반을 연애하면서도 단 한 번도 싸우지 않았고, 이 사람이라면 평생을 맘 편히 살겠구나 하고 정인은 속으로 믿음을 키워갔다. '일편단심, 한결같은'이라는 단어들은 이런 사람한테 쓰라고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정인은 자기가 나중에 늙고 아플 때에도 동욱은 제 옆을 지켜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고, 그런 확신이 들 무렵 동욱에게 얘기했다. "자기야, 청혼해!!"


자기야, 청혼해!!


동욱은 정인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청혼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몰라 눈을 깜박깜박거렸다. "아니, 지금 당장 하라는 말이 아니고! 천천히 생각해 보고 자기 방식으로 청혼을 해 보라구. 왜? 부담스러워? 결혼할 생각 없어?" "아아ㅏㅏ, 아아니, 청혼을 안 해 봐서... " "아니, 누가 청혼을 여러 번 해 보나? 그냥 진심을 담아서 해주기만 하면 난 만족할 거야. 거창하게 하라는 의미는 아니니까 부담은 갖지 마. 그냥 가만히 있으면, 청혼도 못 받고 나 그냥 결혼하게 생겨서, 이렇게 엎드려서라도 청혼받고, 결혼할라고 그런다. 자기가 너무 쑥맥이라." "후후후. 어.. 알았어. 나중에 해 볼게!" 그렇게 정인은 뭐든 엎드려 절 받기 식으로 동욱의 행동을 이끌어 냈고, 동욱을 옆에 붙인 채로 결혼식도 신혼여행도 일사천리로 예약했다. 동욱은 그저 장난감 거북이에 딸려가는 새끼 거북이처럼 졸졸 정인만 따라다녔다.


동욱이 정말 가진 것은 땡알 두 쪽밖에 없지만, 그래도 착하고 성실한 거 그것만 있으면 정인은 평생을 걱정 않고 살 거라고 확신했다. 정인이 소원했던 건 그저 자기 마음대로,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동욱은 언제나 정인의 말에 동의해 주었고, 정인이 하고자 하는 일에 앞으로도 절대 반대할 일은 없을 거라고 선언해 주었다. 그렇게 동욱은 그동안 모은 2000만원을 가지고 정인과 결혼에 골인하였다.  


정인은 신혼을 즐기기 위해 피임을 하였고 신혼 생활의 여유와 향락을 마음껏 만끽했다. 그러고 나서 2년 후 첫 아들을 낳으면서부터 정인은 결혼이라는 굴레에 속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편이라는 작자와 손발을 맞추며 살아간다는 것이 에베레스트 산을 등반하는 것만큼의 고행이고 고생길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남편 동욱은 원체 말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저 단순히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시키는 것만 할 줄 알고 시키지 않는 것은 절대 하지 않았으며, 옆에서 보고 따라하는 것도 서툴었다. 일일이 하나하나 모든 것을 말로써 가르쳐 주어야만 실행이 되었으며,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설거지를 해도 거품이 사방에 묻어 있었고, 청소를 해도 바닥에 있던 짐들은 그 자리에 정으로 박혀 있었다. 답답했지만, 정인은 그러려니 했다. 남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단순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너무 꼼꼼하거나 까탈스러우면 오히려 자기와 맞지 않았을 거라고 위안 삼으면서.


하지만, 아이가 커가고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이상 행동이 드러나고 정인의 머릿속 물레방아가 자꾸 삐그덕거리게 되자, 정인의 한숨은 깊어져 갔다. 남편과 시댁 문제에 아무리 이야기를 나누려 해도 동욱은 입을 스스로 꿰매 버렸는지 묵묵부답이었다. "자기 생각은 어때?"하고 물으면, 꿰맨 보릿자루는 더 움츠러들고 입밖으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정인은 동욱과 소통을 할 수 없어 우울해졌고, 삶이 불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답답하게 살 바에는 그냥 혼자 사는 게 낫겠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정인은 어느 날 공원을 산책하며 속으로만 되뇌던 이 생각들을 동욱 앞에 털어놓았다. "나, 이렇게 살다가는 병에 걸릴 것 같아. 자기가 변하지 않으면, 시댁 문제에 대해 계속 함구하고 있거나 적극적으로 대화 안 할 거면, 그리구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렇게 피해만 다닐 거면 나는 이혼 생각할 거야." 동욱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마 무어라고 위로를 해 주거나 시원하게 대답을 해 줄 수 있기를 동욱도 스스로에게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동욱은 그럴 능력이 없었다. 동욱은 자기의 생각을 정리하고 그것을 문장으로 만들어서 조리있게 말해 본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동욱에게 이 난관은 쉽게 건널 수 없는 강이었다. 하... 어떡하지. 

이전 12화 11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