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절약
고물가, 고금리, 고유가 3高의 시대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모양새다.
나는 내 영혼도 모자라 가족의 영혼까지 끌어 모아 집을 지은 찐 하우스 푸어이다. 최근 남편은 조금이라도 싼 이자로 신용대출을 갈아타 볼까 하고 은행에 방문했다. 대출 가능 여부를 조회하던 은행원은 우리의 대출 금액에 화들짝 놀라며 "지금은 이재용이 와도 더 이상 안돼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더 달라는 거 아니고, 갈아타고 싶다고 했을 뿐인데 문턱에 닿자마자 거절당했다. 아, 웃프다.
이런 상황에 나는 일을 쉬고 있다. '가족의 멘털 관리'라는 중책을 맡고 있어서라고 큰소리치며 버티고 있지만, 언제든 다시 "일자리 있나요?" 하고 나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우리는 그 어느 때 보다 소비에 신중하게 되었다. 여전히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되, 아낄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하고 있달까? 하지만, 이런 상황이 생각보다 우울하거나 힘들진 않다. 팔 건 팔고, 줄일 수 있는 건 줄이고, 대체할 수 있는 건 대체하며 나름 '즐거운 절약'을 하고 있다.
사실 집짓기 전부터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언제까지 저금리가 지속될 수도 없고 그럴 경우에 어떻게 대비할지에 대해 남편과 얘기를 나누었었다. 생각보다 그 시기가 빨리 오긴 했지만, 내일을 걱정하느라 오늘을 고민으로 채우고 싶진 않다.
다행히 주택살이는 '즐거운 절약'의 일등공신이다.
캠핑 마니아였던 우리는 최소한의 캠핑 장비만 남겨 두고 모두 당근과 중고나라에 내놓았다. 그 후, 자주 마당 캠핑을 즐기고 있다. 캠핑장 비용, 유류비 등의 절약은 물론이고 큰 텐트와 장비들을 펼쳐 놓고 정리하는 시간과 노력이 줄어들어 훨씬 편해지기도 했다. 가끔 자연이 그리울 땐 그늘막 하나 들고 당일 캠핑을 즐기러 가기도 한다. 그동안 캠핑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했던 바비큐와 불멍은 이제 집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편이 즐기던 취미생활 중 하나였던 영화 감상도 집에서 가능하게 되었다. 남편은 이제 웬만한 극장보다 더 좋은 사운드로 시간의 제약 없이 영화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의 취미가 온 가족의 취미가 된 것은 주택살이가 준 덤이기도 하다. 그동안 영화에 관심이 없던 아이는 이사온지 2개월 만에 마블의 전 시리즈를 정복했고 새로운 시리즈가 나오는 날엔 팝콘과 아이스크림을 준비하고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영화를 본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오늘 본 영화에 대한 감상, 다음 편에 대한 기대를 나누다 잠이 들곤 한다.
하교 후 집에 돌아오면 "심심해. 뭐 하고 놀아요?"를 외치던 아이 때문에 키즈 카페며 각종 체험을 하러 다니던 일상도 바뀌었다.
마당에 놀러 온 곤충을 관찰하고, 잔디에 물을 주며 물놀이를 하고, 날씨가 좋은 날은 데크에 그늘막을 펴고 종일 안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아빠와 엄마가 하는 페인트칠을 돕고, 여름 대비 마당 수영장을 직접 조립하고, 하굣길에 만난 예쁜 돌멩이를 주워 마당을 꾸미기도 한다. 밖에서 주택 단지 아이들 소리가 들리면 킥보드를 끌고 나가 함께 타기도 하고 땅을 파서 개미집을 만들며 놀기도 한다.
그리고 집 안에서도 잠들 때까지 마음껏 소리치고 뛸 수 있는 아이는, 더 이상 아빠와의 놀이를 주말로 미루지 않게 되었고, 그 자유로움은 아이의 상상력에도 날개를 달아주는 것 같다.
불금에 마주 앉아 한 주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즐기는 술과 안주는 우리 부부에게 빼놓을 수 없는 인생의 즐거움이다. 아마 오늘도 열심히 냉털 안주를 만들겠지만, 그 어떤 호화로운 술상이 부럽지 않을 것 같다.
집을 얻은 대가로 많은 것을 아끼며 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절약이라면, 앞으로도 기꺼이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