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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달 Aug 29. 2022

목수가 될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늘 이런 식이다. 나의 게으름은 뭐든지 함께 하고 싶어 하는 그의 집요함에 결국은 항복하고 만다. 나는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고 불편해도 더 이상 손 쓸 수 없을 때까지 버티는 편이다. 하지만 남편은 새로운 도전을 즐기고 불편함이 발생하는 즉시 해결해야 하는 성격이다. 문제는 이런 남편이 뭐든지 나와 함께 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혼자서 판단하고 혼자서 실행하는 것이 익숙한 내겐 남편의 계획부터, 실행, 후기까지 속속들이 공유받고 공감해 주는 것도 꽤나 에너지가 필요한 일인데, 그것도 모자라 가능한 한 모든 것을 함께 하려고 하니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예시 1)

남편: “ 요즘 자전거 타기 딱 좋은 계절이다."

나: “그럼 가서 한 바퀴 돌고 와."

남편: “무슨 소리야?" 당신이랑 같이 가야지."

예시 2)

나: "당신 게임하는 동안 난 책 좀 볼게."

남편: “그럼 게임하는 내 옆에서 당신은 책 보면 되겠다."


물론 매번 이렇게 직접적으로 들이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관심사에 나를 끌어들일 때 주로 쓰는 방법인데 가랑비에 옷 젖듯 계략에 넘어가게 되니 주의해야 한다.


1단계: "여보, 나 하는 거 잠깐 도와줄래?"

2단계: "이것만 한 번 해볼래?"

3단계: "이것도 해볼래?"


그렇다. 누군가를 설득할 때 그는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해 같은 사람이다. 결국 해의 잔잔한 회유에 넘어가 침대가 아니면 못 잔다던 나는 어느새 능숙하게 캠핑 짐을 싸고 있었고, 도로를 질주하는 바이크 라이더들을 보며 위험하다고 혀를 쯧쯧 차던 나는 어느새 "여보, 달려."를 외치며 전국을 여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엔 2년간의 집요한 설득에 넘어가 SNS도 시작했다.



사실 이번에도 목공을 시작하겠다고 할 때 어느 시기에 어떻게 들이댈지 몰랐을 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고백은 상남자 스타일로 직진하더니 취미생활은 이렇게 뭉근하고 집요하게 빈틈을 노리며 잠입하니 긴장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처음엔 거실에 넣을 붙박이 책장을 만드는 것으로 시작했다. 워낙 부피가 크고 혼자서 들 수 없는 무게였기에 함께 드는 것만 도와달라고 했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바니쉬 칠을 하고 있었고 샌딩을 하며 현타가 왔다. '아, 내가 또 이러고 있구나.' 결국 또 원치 않던 나의 능력이 1포인트 상승했다. 책장 잡아주기 도우미로 가볍게 시작했던 나의 목공체험은 욕실장, AV장, 협탁 만들기로 이어졌고 급기야 담장과 대문을 셀프로 시공하게 되었다. 주말에 남편이 담장 골조에 나무를 잘라 붙여두면 나는 평일에 칠하기 담당이었다. 삼면이 2M 인 담장을 무려 양쪽으로 세 번씩, 총 아홉 번! 그 덕에 하나 둘 올라오기 시작한 훈장 같은 기미는 이제 수를 헤아리다 잠들 지경이다.


하루는 그가 "이거 한 번만 해볼래?"라며 드릴을 내밀었다. 2단계 기술이다.  나는 평소처럼 손사래를 쳤지만 설득에 못 이겨 시도했고 결국 비싼 나무를 다 망쳐놓았다. 하지만 잔잔하고도 꾸준한 그의 들이댐 덕에 어느새 나는 드릴 능력자가 되었다.(YOU WIN!) 나 같은 의지도 없고 실력도 열등한 학생을 포기하지 않는 그의 집념은 실로 매번 놀랍다. 


그렇다고 그의 집요함이 매 번 통했던 것은 아니다. 수년간 시도했던 밤에 함께 영화 보기는 늘 먼저 잠들고 마는 나의 저질체력 때문에 (잠정적) 포기했고 핫플 다니기는 협조해주지 않았던 아이 때문에 (이것 역시 잠정적) 포기했다. 이것 말고도 남편 입장에선 포기한 항목이 매우 많겠지만 그래도 확실한 건 승률이 높은 쪽은 남편이라는 점이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쪽은 역시 바람보다 해님인 건가. 그렇지만 나그네는 오늘도 더위를 참으며 꿋꿋이 옷깃을 여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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