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샤워를 하고 멀뚱히 서서 고민하다
당신이 놓고 간 잠옷을 입습니다.
우리의 빨래는 같이 돌아가니까
우리의 세제와 우리의 섬유유연제 향만이 날 뿐이지만,
그래도 깊게 들이마시면
당신의 향취가 코끝 어딘가에는 걸린다고 믿습니다.
함께한 날들이 마치 없던 일만 같습니다.
늘 그랬듯 당신은 며칠 머물다 나를 두고 간 것만 같고
나는 원래가 혼자였던 사람이 된 것만 같습니다.
이 집은 어둡고 또 조용합니다.
모든 것이 깊이 가라앉습니다.
어쩌면, 어쩌면 말이죠.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던 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당신이라는 존재도, 함께한 날들도
꿈이거나 혹은 환상이거나 혹은 그 비슷한 무엇이거나.
사실 처음부터 나는 혼자였던 것이지요.
잠시 단꿈에 빠졌던 것이지요.
너무나 달디 달아서 깨지 않기를 바라고 바랬던.
이어지고 이어지다 더는 이어질 수 없어 마침내 현실을 맞이하게 된.
그 기억을 붙들고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살아가게 만드는
어느 한 날에 붙박인 잔인한 망상 말입니다.
이 집엔 바람이 불지 않지만
촛불이 심하게 일렁입니다.
보고 있노라면, 바라다보고 있노라면,
나 역시 촛불의 몸체를 따라 휘청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랑에 집중하지 않고
알지도 못하는 그 너머를 궁금해 합니다.
내 마음도 모르는 내가,
감히 당신의 마음을 재단합니다.
참 우습지요?
예, 저도 제가 참으로 우스운 꼴이라는 걸 인정합니다.
당신이 시야에서 사라지니 나는 이리도 흔들립니다.
혼자서는 원래 바로 설 수 없던 사람이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 지경이라니요.
새삼 놀랍습니다.
당신 없던 날에 나는 과연 어찌 살아 숨 쉬었던 걸까요?
생각하면 까마득해집니다.
더없이 아득해집니다.
그게 과연 사는 날들이었을까요?
아뇨. 그냥 숨만 붙어 있던 날들이었음을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압니다.
당신 없는 이 집에서 나는 무얼 할까요.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익숙한 소리가 들리지 않고
익숙한 형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조명을 가려오지 않습니다.
살기 싫다는 투정 같은 마음을 가졌던 어느 날이
다시금 떠오릅니다.
당신을 가진 후 어떻게든 살아봐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던 나는,
당신 없이는 살고 싶지가 않습니다.
살아도 살아서, 죽어도 죽어서 당신과 함께이고 싶습니다.
당신, 나와 같은 관에 들어가시겠습니까?
나와 모조리 태워져 함께 재가 되시겠습니까?
그리하여 아주 고운 가루로 섞이고 섞여
누가 누구랄 것도 없는 상태가 되어
영영, 영영 함께 하시겠습니까?
살았을 땐 산 채로, 죽었을 땐 죽은 채로 말이죠.
당신이 없으니 나는 또 습관처럼 죽음부터 그립니다.
내 손에 쥐어진 펜은 그것밖엔 그릴 수 없는 물건인가 봅니다.
삶의 영롱함 따위는 내게서 먼 것, 그래 그런 것이지요.
나는, 이 글을 쓰며 행하는 추태를 마치면
빨래를 널고 건조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할 겁니다.
다시 돌아올 당신을 맞이해야 하니까요.
이불 빨래도 할 겁니다.
지난밤 우리의 흔적으로 얼룩져 있으니까요.
그대 어서 돌아와 새로운 흔적을 새겨주었으면 합니다.
두 번째 밤이 지나고, 세 번째 밤마저 지나면 당신이 돌아오겠지요.
그리고 또 다시 함께하겠지요.
언제까지요?
나와 언제까지 함께인가요.
영원히 그러하다고, 영영 그러하다고
말해주세요, 내게 말해주세요.
휘어진 눈을 한 채 내게 입 맞추고
음률을 실어 내 이름을 부른 후
우리는 영원하다고 말해주세요.
나는 그것이 거짓임을 알아도 마냥 행복할 겁니다.
두 번째 밤이 지납니다. 당신이 없는 바로 그 밤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