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의 원형은 어린아이이다.
자라날 기회가 있었던 부분은 달라지는 것이고
그러지 못한 부분은 여전히 남아 어린 날에 머무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생각과 마음으로 어른의 날을 살아가기에
때론 스스로 버겁고, 쉽게 상처 받고,
또 그로 말미암아 타인에게 상처 주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이의 모난 부분을 발견 했을 때
저 사람은 저 부분이 아직 여물지 못한 아이구나 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아주 조금만큼은 너그러워진다.
그 부분을 본인이 제일 힘들고 불편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고
그로인해 투쟁하는 날들을 살아가고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면
괜히 그렁한 눈으로 애잔히 바라보게 된다.
나의 어린 날들은 나를 멍하니 혼자 앉아 있다가
속으로 무너지는 사람으로,
자꾸만 울게 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과거에 매여 있고 싶지 않지만
돌아보기, 멀어지기, 수용, 인정, 긍정, 부정, 해탈 등
온갖 걸 다 해봐도 어린 날의 나는 도무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내가 가진 전부는 그 아이여서
그 아이를 잃으면 그냥 텅 빈 사람이 되어 와르르 무너질까 두려워 그러한가.
그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어린 날의 나를 어른의 내가 만나 안아주는 상상.
어린 날에 어른의 일들을 겪으며 어른인척 살아가는 그 아이를
어른의 날에 살지만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진 가짜 어른인 내가.
이미 겪은 일도 무수하지만 더욱 기가 막힌 일들을 겪게 될 그 아이를.
헤쳐 왔지만 이겨내지는 못했던 어른의 내가.
꼭. 혹은 꽉.
안아주는 상상.
잘 견디라고. 결국엔 모두 지나간다고.
네가 너인 것에는 아무 잘못이 없고
아무 것도 네가 선택한 것은 없다고.
너는 그저 선할 뿐이라고.
그 시절 갖게 된 손톱 옆 거스러미를 뜯는 버릇은
근 삼십 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진다.
초조하고 불안하면 어김없이 손을 물어뜯는다.
항상 손톱 주변이 상처와 새살로 얼룩져 있고
핏빛을 띄고 있다.
한때 약을 잘 먹으면서 손을 조금 덜 뜯게 되었을 때
병원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 습관을 버리면, 어린 날의 나를 버리게 되는 일 같아요.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땐 그랬다.
내가 더 무너지지 않게 나를 해하며 함께 견뎌온 시간들을
모조리 그 아이에게만 지워주고 나만 떠나는 느낌이었다.
너를 남겨두고, 나만.
너는 여전히 고통 속에 살 텐데.
내가 너를 버리면 너는 정말이지 아무도 없을 텐데.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든다.
내가 내 아이를 낳아 기르면 그때는 괜찮아지려나 하는.
내가 받지 못했고 그렇게나 받고 싶었던 사랑을
특정 대상에게 퍼부으면 지난날이 북받쳐 서러워져 우는 날이 있더라도
내가 치유되지는 않을까 하는.
그러나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한 내가
과연 제대로 된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의문이다.
폭격적인 사랑을 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부모의 사랑처럼 한도 없고 끝도 없고
이유도 망설임도 없는 그런 사랑.
하지만 그런 걸 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나조차도 나에게 그래주지를 못하고,
아- 역시 다시 태어나는 것밖엔 방법이 없는 걸까 싶다가도
굳이 다시씩이나 태어나야 하나 싶다.
그래도 좋은 점 한 가지는,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마음에 품고 살기에
나와 같은 사람을 더 잘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대면하게 된 상대가 몇 살이든지 간에
그 안의 가장 여리고 어린 면을 볼 수 있고
내면의 홀로 우는 아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근데 이런 것 따위 굳이 없어도 되는 능력이니까
굳이 다시씩이나 태어난다면
그저 사랑받고, 그저 웃고, 그저 우는
아이다운 아이로 살고 싶다.
주어진다면, 기회가 된다면 꼭 그래보고 싶다.
아무런 상처 없이 자라난 어른의 나는 지금과 얼마나 다를지가, 무척이나 궁금하다.
내가 아닌 내가 될 수 있던 기회가 절망스러울 정도로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