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기를 돌이켜 보면 나는 항상 무언가를 적고 있었던 것 같다. 형태와 내용은 달랐지만. 때로는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편지를 쓰기도 하고, 때로는 학교 숙제로 내준 글쓰기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소설을 써보겠다 생각해 한동안 공상하던 내용을 글로 옮긴 적도 있고, 한때는 노래 가사말을 적어보겠다고 다짐하고는 혼자 멜로디를 흥얼거려 가며 수십 곡의 노랫말을 쓰기도 했다. 물론 한참 지난 후에는 멜로디가 기억나지 않아 절대 부를 수 없는 노래들이 되었지만.(악기를 다루지 못해 악보를 만들 자신은 없었나 보다.) 하지만 청소년기를 지난 후의 글쓰기는 나에게 철저하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사회과학부의 정치외교학을 전공했으니,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글쓰기를 과제로 받는 일은 일상다반사였다. 대학원을 진학하자 본업이 아주 글쓰기가 되어버렸다. 매주 한 편 이상의 에세이를 써내야 하는 과제를 받았고 졸업을 위해서는 논문도 통과되어야 했다. (런던대를 다녔으니 이 모든 걸 심지어 영어로 써야 했다.) 10년 가까이 글을 쓰도록 조종받고 살다 보니 논문을 마칠 즈음에는 글을 쓴다는 일에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나와 비슷한 교육과정을 거친 사람들보다 특별히 더 많은 글을 썼다고는 할 수 없지만, 논문이라는 거대한 벽을 넘고 나니 다시는 벽 너머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런 내가 30대 중반에 다시 글쓰기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 나에게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대부분은 누군가의 지시 혹은 의무에 의해 글을 썼었는데, 막상 내가 원하는 글을 쓰려고 마음먹으니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쓰고 싶은 글의 큰 주제는 정했지만 목차를 잡고 분량을 정하고 각 주제별로 또다시 주제문들을 써 가며 구도를 잡는 일이 수십수백 차례를 거듭해도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글을 잘 써야 한다는 생각에 한 자 한 자 생각에 잠기다 보니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고는 한 3일간 단 한자도 쓰지 못했던 것 같다. 그때 내가 선택한 방법이 바로 무작정 써보기였다. 구도를 잡고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쓰고 싶은 주제에 대해 지금 당장 내 머릿속에 생각나는 것을 적어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런데 이 무작정 써보기의 효과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대단하다는 사실을 머지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글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를 때에는 무작정 아무 말이나 써보는 연습을 해보는 게 최선이다. 어떻게 구도를 잡고 어떤 내용을 어떤 표현으로 적을지를 고민하기보다 우선은 펜을 들고(혹은 노트북을 켜고) 생각했던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물 흐르듯이 적어본다. 어떤 작가들은 특정한 어떤 날 글이 물 흐르듯이 적히는 경험을 하고 그런 날에는 분량을 쭉쭉 뽑아내곤 한다고 들었다. 제대로 글을 쓰기 전에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건 재능을 타고난 특정 작가들의 영역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글을 좀 쓰다 보니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만 같았다. 사실 물 흐르듯 적힌다는 말이 멋진 글이 쉴 새 없이 튀어나온다는 의미는 아니란 건 이런 현상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처음부터 좋은 글을 적는 것도 좋겠지만, 헤밍웨이가 말한 것처럼 모든 초고는 걸레와 같기 때문에 너무 깊이 생각하며 시작하지 않는 습관을 들이는 게 도움이 된다. 마치 지금 내가 이 글을 적는 것처럼. 너무 잘 쓰려하다가 제풀에 지쳐 글 쓰는 일 자체를 스트레스로 받아들이게 되면 머지않아 글쓰기를 중단하게 될 것이다. 글쓰기는 그 자체로도 재미있는 일이어야 하고, 결과적으로도 즐거운 것이어야만 오랫동안 꾸준히 창작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본다.
아내에게서 영감을 얻고 난 후에도 그랬다. 월요일 아침 아무도 없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는 '자! 이제 뭐부터 하면 될까?' 하고 심호흡을 내뱉었다. 주말 동안 머릿속에 그려보았던 글감들을 정리해 볼 수도 있었지만, 나의 선택은 일단 무작정 써보기였다. 우선 집사람에게 들여주었던 첫 에피소드를 깊은 고민 없이 이야기하듯 편하게 적어보았다. 이번에도 역시 말로 내뱉어본 것들이라 순조롭게 글로 옮겨졌다. 에피소드를 적은 후에는 이 사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시사점과 나만의 생각, 기존 책에 지루하리만치 열변을 토해두었던 카페 경영의 원칙을 더하자 적지 않은 분량의 글이 탄생했다. 글의 분량을 word 형식으로 옮겨 글자 수를 계산해 보니 대략 2천 자 분량의 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략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기 위해 필요한 분량을 10만 자라고 가정하면 대략 50여 개의 에피소드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주제 하나를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계산해 보았다. 에피소드가 잘 정리되어 있다는 가정하에 대략 한 시간가량이면 주제 하나가 완성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에피소드를 정리하고 시사점을 고민하는 시간을 더해도 출근 전 나에게 주어진 두 시간이라는 자유 시간 안에서 충분히 한편을 만들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그렇게 계산하면 50일이 걸렸다. 주말을 제외하면 10주. 책을 구도를 짜는 기간까지 더해 넉넉잡아 3개월이면 한 권의 책을 완성할 수 있는 계산이 나오자 알 수 없는 짜릿함이 나를 감쌌다.
글 하나를 무작정 적어보았는데 얻은 수익이 너무도 과분했다. 어떤 식으로 글을 쓰면 될지, 한 편당 어느 정도의 분량을 쓸지, 시간은 얼마나 걸릴지 대략적인 계획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권의 초고를 완성하기까지 3개월이면 너무나도 훌륭한 수준이었다. 첫 책의 초고를 완성하는데 5년가량이 거린데 비하면 시작과 동시에 끝이 난 기분이었다. 의지와 열정이 내 안에서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