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적어본 첫 에피소드가 나름 마음에 들었다. 첫 에피소드라 더 공을 들였는지 분량이 예상과 달리 늘어져 일부는 들어내야 했다. 여러 번 초고를 읽어보며 미숙한 점을 보완했다. 실제 사례로 이루어진 글은 많은 부분을 수정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완성되자마자 나의 유일하고도 가장 객관적 비평가인 집사람에게 들이밀었다. 집사람은 흥미로운 듯 글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검지와 엄지를 붙여 오케이 사인을 보여주었다. 마음이 500g 정도 가벼워졌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간단한 글쓰기도 그렇지만 책을 쓰는데 가장 중요한 작업은 주제 정하기 다음이 바로 구도 잡기이다. 주제를 정해서 정체성을 정한 후에는 구도를 잡아 글이 다른 데로 새지 않도록 뼈대를 잡아주어야 한다. 뼈대를 튼튼하게 잡아야 살을 엉뚱한데 붙이지 않을 수 있다. 뼈대만 잘 만들어준다면 실제로 글을 써서 살을 붙이는 일이 무척이나 쉬워진다. 반면 뼈대가 잘 세워지지 않으면 글은 표류하게 된다. 내 첫 책은 몇 번의 편집과 교정 과정을 거치면서 여러 번 구도가 변경되었는데 저자 스스로 정확한 구도를 잡고 글을 전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자평한다. 몇몇 에피소드는 여기저기로 위치를 옮겨야 했고, 또 몇몇 내용들은 주제에 어울리지 않아 삭제되기도 했다. 이런 헛수고를 또다시 겪지 않으려면 구도를 신경 써서 잡아야 했다.
우선 기억에 떠오르는 에피소드를 쭉 나열해 보았다. 가망 없는 자리에 오픈한 카페, 점포를 이전해서 성공한 카페, 인력이 속을 썩인 카페, 매출은 높은데 손익이 안 좋은 카페 등등. 생각나는 대로 에피소드를 나열하다 보니 어느덧 열 개 이상의 주제들이 그려졌다. 떠오른 주제들을 큰 주제별로 묶어보았다. 창업에 관한 주제, 매출 관리에 관한 주제, 인력 운영에 관련된 주제. 이 세 가지 주제에 들어가지 않은 재료들도 묶어보니 운영력과 손익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더 추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주제들이 큰 꼭지가 되었다. 각각의 꼭지 아래로 추가할 에피소드를 나열해 보자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는 듯했다. 분량을 감안한다면 한 주제당 대략 10~12개의 에피소드가 필요했다. 술술 적혀 내려간 에피소드들은 이미 자리를 잡았고 각 주제별로 모자라는 에피소드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
사람의 생각이 잘 정리되는 곳을 3상이라고 표현한다고 들었다. 하나는 마상, 하나는 침상, 다른 하나는 측상이다. 마상은 이동수단을 의미한다. 말 마자를 사용해서 마상이다. 현대 사회에 적용해 보면 차나 지하철을 이용해 어디론가 이동할 때의 시간을 뜻한다. 업무의 특성상 차로 이동하는 시간이 많은 나는 핸들을 잡고 운전하면서 다른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에 생각에 잠기곤 하는데 정말 신기하게도 생각이 깨끗하게 정리되는 경험을 종종 하곤 한다. 침상 또한 유사하다. 잠자리에 들기 전 침대에 누우면 이상하리만치 냉정한 생각이 가능해지곤 한다. 물론 금세 잠이 들어 오래가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측상에서도 생각의 힘은 발현된다. 볼일을 볼 때도 물론 그렇지만 내 경우에는 샤워를 하면서 생각이 많이 정리되는 느낌이다. 이 세 곳에서 생각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은 스마트폰이다. 스마트폰을 열지만 않는다면 아마 당신도 나와 유사한 경험을 했노라고 쉽게 동의할 테다.
생각이 잘되는 곳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던 나는 운전 중에, 침대에서 그리고 화장실에서 한동안 휴대전화를 열지 않았다. 대신 어떤 에피소드를 채워나가야 할지 고민에 잠겼다. 역시나 생각의 3상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에피소드들이 하나씩 채워져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각 주제별로 12개씩이나 되는 에피소드를 뽑아낼 수 있었다. 총 4개의 주제에 48개의 에피소드. 에피소드 하나당 대략 2천 자 내외가 완성되니 목표로 하는 10만 자는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초고 완성 기간도 최초에 세웠던 3개월 안에 충분하겠다는 느낌이 왔다. 그럼 더 망설일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 바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