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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꼬 Sep 23. 2022

공채형이 들려주는 영국유학기

Chapter 24.

한국으로 돌아올 때의 목표는 국내 3대 대기업이었다. 원대한 포부를 품은 만큼 목표 또한 높았다. 아버지가 H사에서 근무했었기 때문에 H사는 가장 가고 싶은 회사 중 하나였다. H사를 포함해 국내 3대 대기업에 취업을 도전해 보고 안 되면 런던으로 돌아와도 좋다는 심산이었다. 런던대 대학원까지 졸업했는데 아무 곳에나 되는대로 취업하고 싶지는 않다는 호기인지 객기인지 기고만장한 자만감이 내 머릿속에 스멀스멀 자라나고 있었다. 하지만 귀국과 동시에 내 생각은, 아니 내 마음이 180도 달라졌다. 지금은 더하다 하지만 취업 시장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여기저기서 취업이 어렵다는 뉴스가 시시각각 흘러나와 구직자들의 마음을 좌불안석하게 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스스로 자신감이 결여될 수밖에 없었고, 원하는 기업으로의 취업이 아닌 ‘취업’ 자체가 목표가 되었다. 귀국 초기에 가지고 있던 자만심은 스위치라도 달린 듯 한순간에 겸손함으로 바뀌었다. 가고 싶은 회사를 가는 사람보다 갈 수 있는 회사를 가는 사람이 더 많다. 현실이 그렇다. 취업을 준비하면서 점점 초조해지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가고 싶던 회사와 하고 싶던 직무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고, 기대했던 회사가 아닌 곳에 취직하게 된다. 이런 사람이 한국에 최소 몇만에서 몇십만 명이나 되니 나 또한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학을 다녀오면 남들보다 우위에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영국에서의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이만 먹었다. 주변 친구들은 대부분 취업을 해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으니 마음이 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누나와 단둘이 지내게 되면서 아는 사람도 거의 없으니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취업을 준비하는지 알 길도 없었다. 왠지 논문 때문에 나만 혼자 뒤처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혹시나 이번 시기를 놓치게 되면 적어도 6개월 이상은 누나 집에 얹혀살며 밥만 축내는, 언제 누나가 던져줄지 모르는 용돈만을 기다리는 백수가 된다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불안해졌다. 용돈을 받게 되면 안 그래도 갑을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누나의 온갖 잔소리를 들어야 하니 그런 상황은 애초에 만들면 안 된다. 사람이 참 단순하다고 생각된 것이, 런던에 있었다면 이런 초조함은 전혀 없었을 것 같았다. 6개월 정도의 시간은 편하게 알바나 하면서 여유를 즐겼어도 괜찮았을 거다. 나라는 사람은 똑같은데 단순히 12시간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초조함을 느낀다는 것이 참 우습기도 했다.      

대기업 공채 소식이 하나둘 열릴 때마다 홈페이지에 접속해 필사적으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적어 제출하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대기업의 인사 DB는 서로 공유된다는 소문과 함께 자기소개서를 똑같이 적어서 제출하면 필터링에 걸린다는 루머가 돌아 각각의 회사마다 자기소개서를 새로 작성해야 했다. 개인 신상이나 학력 등 이력서를 적는 일은 답이 있기 때문에 비교적 간단했지만, 자기소개서는 그야말로 고3 수학선생님이 내어준 죽어도 반복하기 싫은 삼각함수 숙제와도 같았다. 나라는 사람은 하나인데 지원하는 회사마다 다른 나를 소개한다는 것이 정상적인 건지 의문이 들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매번 성심껏 지원서를 작성했다.     

처음 생각과는 다르게 수십 곳의 대기업에 원서를 접수했다. 더 이상 지원하는 회사의 사업 분야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 회사에서 요구하는 인재상과 지원 요건을 확인하여 결격사유만 없으면 닥치는 대로 원서를 넣었다. 아마 지금의 취준생들이 대부분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전공을 살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지라 대부분 경영지원이나 기획 쪽으로 지원했는데, 당시엔 기획팀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몰랐던 것 같다. 사실 기획업무를 3년 넘게 한 후에도 잘 모르겠더라. 영어로는 Planning Team인데 뭘 계획한다는 건지... 원서를 넣는 곳이 수십 곳에 이르니 이제는 지원 직무도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최대한 많은 곳에 지원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렸고, 어디든 한 곳만 걸려주기를 기도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지원하는 곳마다 서류 전형에서 탈락하는 것이었다. '왜일까? 무슨 문제일까? 결국은 SKY만 되는 건가?' 서류 전형 탈락 소식이 늘어날수록 내 머릿속은 상당히 복잡해졌다. 원서를 쓴 기업 중에는 종종 중견기업도 섞여 있었는데, 하나같이 면접까지는 가보지도 못하고 불합격 소식이 이어지다 보니 귀국할 당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자신감과 희망은 이내 분노와 공포로 변해있었다. 불안감이 쌓여갔지만 원인을 알려 줄 사람도, 도움을 받을 만한 곳도 나에게는 없었다. 해외에서 막 귀국한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 서울에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답을 알려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유학파 왕따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서류전형 불합격의 이유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지원했던 업체마다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취업 후 내가 판단한 나의 문제점은 쓸데없는 고스펙이었다. 처음부터 영국살이의 목표가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취업을 위해서 스펙 개발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평범한 지방대 학생에서 런던대 유학생이 되었으니 일취월장, 상전벽해가 아닐 수 없다. 대학원을 진학한 주목적이 취업이었던 만큼, 졸업만 하면 더 좋은 직장에 취업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저변에 깔려있었다. 한데 이런 내 스펙이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격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석사가 학사보다 우대받을 것 같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통상적으로 석사의 수학 기간을 경력으로 인정해 주는 경우가 많아 일반 학사 졸업생보다 연봉도 높게 책정되고, 승진도 1~2년은 빠르기 마련이다. 물론 회사마다 시스템이 달라 이를 반영하지 않는 회사도 많다. 그런데 석사 졸업자라고 해서 학사학위자보다 일을 훨씬 더 잘할까? 그들이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이라는 보장이 있을까? 지원하는 분야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일반적인 직무에서는 그렇지 않다. 학사건 석사건, 심지어 박사라 할지라도 신입사원은 신입사원이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까먹고, 어리숙함으로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일은 못해도 패기는 있어서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에는 또 솔선해서 덤벼들다 실패하기를 거듭한다. 가만히 좀 있으라는 말이 단전에서 끓어오른다. 어느 회사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그들을 굳이 3~4백만 원을 더 주고 데려올 필요가 있는가 말이다.     

그래서 추가 진학은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 최근에는 고스펙의 구직자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대학원 졸업자에게도 별도의 프리미엄은 제공되지 않는다. 운이 좋다면 채용에 우선권을 주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겠다. 추가 진학을 하면 취업할 기회가 많아질 것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대학 시절 한 교수님께 어쩌다 교수가 되셨는지 질문했을 때 들었던 대답과 같다. 교수님께서는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했다고 하셨다. 열심히 공부하면 돈을 많이 벌 줄 알았다고 하셨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갈 수 있는 길이 좁아졌다고 한다. 학사와 석사를 거쳐 박사를 하고 나니 그다음은 선택의 폭이 줄어들어 결국 교수가 되셨다고 했다. 그 말씀이 사실이었다. 학력이 높아질수록 갈 수 있는 길이 제한적이다. 쉽게 예를 들어, 어렵게 석사를 마치고 공사판에 뛰어드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한 말이다. 고용되는 사람도 기대하는 바가 있을 테지만, 뽑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업무의 정도에 상응하는 교육을 받은 사람을 채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추가 교육을 받을 때는 이러한 점을 사전에 예측해서 나와 같은 불안함에 놓이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거듭 말하지만, 공부를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좁아진다.      

서류전형을 통과한 몇몇 회사가 있었지만 각 회사에서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인·적성 평가 또한 나에게 닥친 난관 중 하나였다. S사, D사, H사 등 대부분 대기업에서 자체 개발한 직무 능력 검사를 시행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지원자가 대학 졸업 이전부터 회사별 인·적성 평가의 기출문제를 풀어보며 이를 대비한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인·적성 평가가 있는지조차도 몰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정보력도 없다. 고사와도 같은 이 시험에 미끄러지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아 공무원 시험을 방불케 한다는 사실을 귀국 후 한참이나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심지어 과락이 있는 시험도 있었다. 특정 부분에서 기준 미달은 뽑지 않겠다는 말이다. 대학 졸업장만으로 우리가 지성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시대는 지난 것 같다.     

가장 마지막으로 입사 전형이 이루어지는 곳은 C사였다. C사의 채용 공고를 살펴보면서 어느 분야에 원서를 넣을 것인가 고민을 거듭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르지만, C사에 외식 계열사가 눈에 들어왔다. 한국 맥도날드에서 4년, 영국 맥도날드에서 1년, Costa에서 바리스타로 1년 이상 근무하며 외식업계에 경험이 있던 나에게 딱 맞는 회사처럼 보였다. 사실 나처럼 첫 사회생활을 외식으로 시작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로 널렸을 테지만, C사의 공개채용 모집 요강을 바라보던 내 느낌은 그랬다. 아니, 뭔가 인연이 있을 거라고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다.     

울산에 있는 대학 동기 중 C사에 친구 도진이가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진이는 1년 전 C사의 계열사 중 하나인 급식 전문 업체에 그룹 공채로 취업했다. 당장 도진이에게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도진이의 반응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하고많은 회사 중에 왜 C사냐고 되물을 정도였다. 당시의 나로서는 부럽기만 한 도진이가 왜 자기 회사에 애착이 없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잡은 물고기에 밥 안주는 뭐 그런 건가? 아니면 뭐 남에 떡이 커 보이고 그런 거? 무언가 불만이 많아 보였던 도진이는 지금도 아주 열심히 회사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신입사원 때는 누구나 남에 회사가 좋아 보이나 보다.     

C사의 인·적성검사를 보러 가는 날 시험장 안내를 맡고 있는 도진이를 만났다. 검은 양복을 입고 회사를 대표해서 지원자들을 안내하는 그의 모습이 사뭇 부러웠다. 아니 겁나게 멋있었다. 상대적으로 나는 청바지에 티셔츠, 그리고 백팩을 메고 있으니 무언가 초라해진 기분이었다. 도진이는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고 더 좋은 회사에 가라고 나를 회유했지만 나는 C사가 좋은 회사라며 그의 말을 흘려버렸다. 자기는 근사하게 대기업 공채로 취업해놓고 친구 놈에게는 오지 말라니. 후회할 때 후회하더라도 나도 대기업 밥 좀 먹어 보자! 그때 도진이의 말을 들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을까?     

그동안 몇몇 기업의 인·적성에서 보기 좋게 낙방한 경험이 있는 나였기에 큰 자신감을 가질 수는 없었다. 다만, C사는 인·적성 성적이 절대적 채용의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조금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여느 인·적성 평가와 비슷하게 시험을 치렀다. 문제는 최선을 다해 풀었고, 인성평가는 최대한 일관된 대답을 하고자 노력했다. 네티즌들이 알려준 그대로 말이다. 평소 수학을 죽기보다 싫어했던 나에게 수학 문제는 여전히 어려웠고, 빈칸으로 남겨둔 것도 있었다. 인·적성에서만큼은 한 번호로 찍어 틀리느니 차라리 비워두고 풀지 않는 편이 더 쿨해 보일 것만 같았다. 이제는 운에 맡기자는 생각과 함께 시험장을 나왔다.     

취준생으로서의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초조함은 극에 달하고 있었고, 이제는 대기업 공채도 대부분이 종료되었다. 아직 몇몇 기업의 결과 발표 전이었지만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누나 집에 얹혀살며 밥만 축내는 식충이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일단 돈이라도 벌지 않으면 찌질한 취준생일 수밖에 없다. 런던에서도 찌질했지만 비참하지는 않았다. 서울에서 찌질함은 비참함을 의미했다. 돌아오지 말걸 그랬나? 아니야! 그래도 한국에서 취업을 해야지! 수시로 후회와 체념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더 늦기 전에 중소기업이라도 알아보아야 했다. 대부분의 대기업은 일정 기간 이상 해외 유학 사실이 증명되면 별도의 영어점수 제출이 면제되지만, 중소기업은 이러한 제도가 없었기에 서둘러 토익 시험부터 준비하기로 했다.     

토익 시험을 치르는 날은 C사의 인·적성시험 다음날이었다. C사 인·적성시험을 마치고 나자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급격히 허기를 느낀 나는 집 근처 시장에 들러 빵 몇 개를 사서 집으로 왔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난 탓도 있지만 오랜만에 머리를 썼더니 몸이 아주 피곤한 듯했다. 사 온 빵을 허겁지겁 먹고는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배가 아픈 것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장염인 것처럼 아랫배가 아파왔다. 저녁 무렵 집에 온 누나에게 배가 아프다고 이야기하자 누나가 약을 사 왔다. 약을 먹고는 곧 나아지겠지 하며 다시 잠이 들었지만, 새벽에도 계속 배가 아파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도 배는 여전히 아팠다. 하지만 예약해 둔 토익시험 때문에 일찍부터 서둘러 시험장으로 향해야 했다.     

시험장에 도착해서도 복통은 계속됐다. 어제 먹은 빵을 원망하며 시험을 치러야 했다. 근데 시간이 갈수록 통증이 심각해졌다. 배가 아픈 와중에도 듣기 평가는 수월하게 치를 수 있었다. 그래도 런던에서 5년 가까이 살았다고 토익 정도는 쉬운 수준이었다. 읽기 시험으로 넘어갈 때쯤 통증은 극에 달했다. 가만히 앉아있기도 어려울 만큼 아랫배가 쥐어짜듯이 아팠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그냥 나갈까 하는 생각이 수십 번도 더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늘 이 시험을 어떻게든 치르면 기본적으로 회사에서 요구하는 토익점수 이상은 받을 테지만 지금 박차고 나가버리면 또다시 시험을 예약하고 점수를 받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자칫하면 취업 시기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픈 배를 움켜잡고 끝끝내 시험을 모두 치러야 했다. 말도 못 하게 아팠지만 참는 수밖에 없었다.     

시험을 마친 후 누나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집에서 가까운 구로 K대병원을 찾아 응급실로 들어갔다. 토요일이라 외래 진료는 당연히 없었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응급환자가 넘쳐나고 있었다. 당시 유행이었던 신종플루 의심 환자들로 말이다. 전국에 신종플루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전부 이 병원으로 모인 것만 같았다. 주로 아이들이 많았는데, 몇몇 혈기왕성한 아이들은 전혀 아파 보이지도 않게 병원을 놀이터 삼아 잘도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지금 걸을 수도 없이 아픈데 말이다. 응급실에 접수하자 아주 당연하게 기다리라는 이야기가 따라왔다. 한쪽 소파에 앉아 엄청난 고통을 느끼면서 지옥 같은 기다림의 시간을 보냈다. 간호사에게 재차 배가 아프다는 사정을 이야기했지만, 순서대로 처리해 주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앵무새 같은 간호사에게 짜증이 났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저녁이 되도록 한참을 기다린 후 내 바로 앞에 온 아이가 응급실로 들어가는 것을 본 나는 간호사에게로 가서 배가 아파 못 견디겠노라 다시금 이야기했다. 응급실에 들어갔다 나온 간호사가 나를 응급실 침대로 안내했고, 곧이어 놓아준 링거를 맞고는 통증이 가라앉았다. 진통제였던 것 같은데 왜 이제야 진통제를 주는지 원망스러웠다. 곧이어 의사가 와서 배를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언제부터 이랬냐 한다. 어젯밤부터 이랬다 했더니 흠칫 놀라면서 많이 아팠을 거란다. 그래 이 의사 양반아! 많이 아팠다! 정말 죽을 만큼 아팠는데도 참으면서 토익시험도 치렀다! 그것도 890점이라는 점수까지 받으면서! 의사가 놀라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맹장염이 오면 보통 움직이지도 못한다. 근데 나는 그렇게 아픈 채로 무려 24시간 가까이 버틴 것이다. 기다리라고 한 간호사에게 한마디 쏴주고 싶지만 한 번 더 참았다. 이 병원에는 수술실이 부족해 인근 병원으로 옮겨 수술한 후 며칠간 입원하라고 했다. 그럴 거면서 나를 이렇게 기다리게 했냐?     

생각해 보니 아찔했다. 만약 내가 영국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죽이지는 않았을 거다. 영국은 인도주의적 국가니까... 내가 영국에서 맹장에 걸렸다면 모르긴 몰라도 응급실에서 8시간 이상은 기다렸어야 할지 모른다. 영국의 응급실은 방이 두 곳으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생명에 지장이 없는 응급환자이고, 다른 하나는 그냥 두면 죽을만한 응급 환자이다. 첫 번째 방으로 들어가면 기본 대기 시간이 4시간에서 8시간이지만 두 번째 방으로 들어가면 세계 최고의 의료진이 어떻게든 환자를 살려낸다. 실제로 한인회에서 잠시 함께 일했던 한 남성분은 아이가 선천적으로 앓고 있는 희귀병 때문에 영국에 왔다고 했다. 한국에 있으면 구급차가 오기 전에 아이가 죽을 것 같아서다. 그만큼 영국은 의료시스템이 잘 되어있는 곳이면서도 동시에 의료에 취약한 곳이기도 하다. 한 번은 친한 동생이 운동하다 팔이 부러졌다. GP(동네마다 위치한 보건소와 같다.)로 가서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붕대 한 묶음과 먹는 약을 줬다. 그러고는 하는 말이

"Sorry, there's nothing I can do for you." (미안하지만 해줄 게 없네요)

란다. 부러진 팔에 먹는 약이 웬 말이란 말인가? 한국과 같은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받으려면 어마어마한 돈이 드는 곳이 영국이었다. 이번의 경우는 내가 운이 좀 없었던 축에 속하지만, 막상 치료를 받고 나니 한국에서 아픈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 아프면 좋았겠지만...     

맹장 수술로 인한 입원 기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백수가 되었다. 하루 한 번 병원을 다녀온 후에는 좁은 방 안에서 몇 해 전 종영한 드라마를 몰아 보거나 인터넷으로 취업 관련 자료를 찾아보며 누나가 퇴근하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순도 100%의 백수 생활이었다. 치여 살던 논문 덕에 책이라면 쳐다보기도 싫었다. 친구가 없으니 운동이건 게임이건 아무것도 재미를 찾을 수 없었다. 대기업 공채가 대부분 낙방해 불안한 마음이 있긴 했지만 일단 수술 후 기운을 차릴 때까지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며칠을 패잔병 마냥 기운 없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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