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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꼬 Sep 23. 2022

공채형이 들려주는 영국유학기

에필로그

길고도 험난했던 유학 생활과 취업 준비가 어느새 끝나고 이내 나는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 제출했던 논문이 한 번에 통과되지 않아 다시 제출해야 했지만 졸업 일정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취업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논문의 형식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교수님의 피드백대로 내용의 일부를 수정 보완하고 단번에 논문을 통과시킨 영옥이 누나에게 조언을 받아 양식을 새로 고쳐 제출했다. 입사 후 1년 동안 마련된 매장 실습 기간에 논문까지 신경 써야 했지만 처음부터 다시 작성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큰 부담은 아니었다. 두 번째 제출이었기 때문에 높은 점수를 받지는 못했지만 마침내 논문은 통과되었고 그 해 8월 졸업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신입사원의 시간은 아주 길면서도 빠르게 흘러간다. 레스토랑과 카페에서 매니저로 일할 때도, 그 후 전략기획팀에서 일할 때도, 신입사원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신입사원의 기본 소양인 어리숙함으로 여기저기서 치이고 무시당하는 일이 나라서 특히 더 많았던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몇몇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긴 했지만, 그들이 남다른 것일 뿐 내가 모자라서 그런 건 절대 아닐 거다. 그렇다고 좀 해주자. 이 시기에 나 자신의 능력에 실망하고 한탄한 적이 많았다. 회사의 쟁쟁한 선배들처럼 내 몫을 하고 싶어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걸음마 시작한 아이가 뛰고 싶어 넘어지는 격이다. 하지만 이런 시간은 금세 흘러간다. 시간이 지나고 신입 딱지가 떼어지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 특히나 후배를 받으면 이를 가장 실감하게 된다. 나보다도 더 어리숙한 누군가를 가르쳐주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자리를 찾아가게 된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회사에 입사해서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회사가 거금을 들여 당신을 뽑은 데는 이유가 있다. 지금 당장은 당신이 제 몫을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언젠가 시간이 되면 당신이 가진 진가를 발휘할 때가 온다. 그렇지 않다면 인사팀에서 먼저 연락이 갔을 거다.     

채용만 해주면 뼈를 묻어 일하겠다고 생각했겠지만, 막상 회사에 들어가면 생각은 바뀐다. 자신의 회사에 만족하는 사람의 비중이 1%도 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너무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 일단 입사를 하면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말이 실감 나게 될 것이다. 쥐꼬리만 한 월급과 밤낮 없는 근무시간으로 받는 스트레스는 취업의 과정보다 더 내 삶의 격을 떨어트리기 십상이다. 게다가 무슨 일을 하느냐 보다 누구와 일하느냐가 중요할 정도로 사람과의 관계는 풀기 어려운 숙제와 같다. 그래서 다들 그렇게 회사 생활에 답이 없다고 이야기하는가 보다. '취업만 하자'라는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직이 답이다'로 바뀔 수 있다. 이직을 해도 답은 없다는 걸 모른 채 말이다. 항상 꿈꾸는 이상은 아름답지만 직면한 현실을 냉혹하다. 꿈을 꾸고 꿈을 좇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바람직한 일이지만 꿈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해두면 좋겠다.  

준비가 덜 되면 덜 될수록 더 그렇다. 준비 없이 꿈을 좇으면 결국 더 냉혹하고 더 어려운 현실을 더 빨리, 더 세게 맞닥뜨릴 뿐이다. 손가락 하나로 때리는 딱밤이라도 준비 없이 맞으면 많이 아프다. 부족한 경험과 부족한 실력으로는 결국 자신의 기준에 부족한 직장을 구할 수밖에 없다. 부족한 직장이라면 (설령 그 기업이 국내 유수의 대기업이라 하더라도) 업무의 영역도, 받는 보수도, 업무의 방식도, 구성원과의 관계도 심지어 회사를 오가는 행위마저도 부담으로 다가온다. 부족한 직장일수록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에 현실은 더 참혹하고 비참할 수 있다. 때문에 시간이 조금 걸릴지라도 촘촘하게 준비하기를 바란다. 자신이 목표로 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준비와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운이 좋아서 남들보다 좋은 회사에 들어간 사람은 없다. 좋은 직장, 좋은 직업을 구한 사람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충분한 준비가 되었다고 봐야 합리적일 것이다. 당신이 목표로 하는 바에 어울리는 준비를 지금부터 차근차근히 해나가길 바란다.     

일단 직장이라는 현실로 들어왔다면 다른 꿈을 갖자. 여기서 꿈은 Dream이 아니라 Vision이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비전을 갖기 마련인데, 저마다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후배들에게 두 가지 비전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하나는 지금 있는 위치에서의 비전이고, 다른 하나는 나라는 사람의 최종 목표이다. 지금 위치에서의 비전은 결국 회사에서의 비전이다. 회사에서의 내 비전은 입사 초기부터 유럽 법인장이었다. 나는 이 비전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다녔고, 내가 밟게 되는 모든 커리어는 유럽 법인장을 위해 가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자신의 비전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하는 것은 사실 매우 도움이 되는데, 비전과 관련된 업무의 기회가 있을 때 회사가 나를 고려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나와 비슷한 비전을 가진 경쟁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나의 비전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할 것을 권한다. 더 강한 의지를 보이는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줄 가능성이 크다. 가능성이 큰 것이지 반드시 이룰 수 있다고 이야기하진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걸 보면 말이다.     

개인적인 비전 또한 반드시 세워 놓아야 한다. 내가 추구하는 궁극적 나의 모습이 훌륭한 엄마인지, 아니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같이 정치인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기업의 CEO 인지, 이를 명확히 해둔다면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실수를 범할 확률을 줄여줄 수 있다. 앞서 잠시 설명한 것처럼 나의 개인적 비전은 지역 전문가였다. 특정 지역에 대한 정부의 정책을 수립할 때 주재원이나 법인장을 경험한 기업인들의 의견이 반영되는 경우가 많다. 해당 지역에서 사업하는 사람들의 현실적 조언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지역 전문가는 또 하나의 외교관이나 다름이 없다. 나는 개인의 목표를 바로 이 지역 전문가로 정했고 유럽 법인장은 이를 위한 중간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마 수년 내에 유럽 법인장이 되지 못하면 개인적 목표를 수정해야 할 것이다. 젠장. 아무튼 이렇게 개인적인 목표를 정해둔다면 중요한 의사결정의 이정표 역할을 해줄 것이다.     

목표는 구체적일수록 좋지만, 과정을 구체적으로 계획하지는 말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옛말이 있다. 오히려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계해버리면 결국 목표와 더 멀어지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목표를 달성한 몇몇 선배들을 보면, 결국 목표는 이루었지만 그 과정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고 했다. 스스로의 비전을 가진 후 이를 타깃으로 정진하되 상황에 따라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면 어느샌가 목표로 세운 비전을 달성해 있더라는 것이다. 반면 과정을 구체적으로 세워두면 그 과정이 내 예상과 다를 때 실망하고 낙심해서 비전 자체를 잃어버리는 수가 있다. 지금 스스로 비전을 확실하게 세워두었다면 그것으로 됐다. 과정은 조금 다를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그 모습이 되어있을 것이다. 한번 비전을 세워 달려본 사람이라면 설령 처음의 비전을 잃었다고 해도 또 다른 비전을 세우고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알고 있으리라.     

지금까지 정리한 나의 경험담은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준 중요한 토양과도 같다. 나의 이야기나 경험을 정확하게 그대로 따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이를 그대로 따라 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설령 따라 한다고 해도 나만큼 험난하기도 어려울 거다. 다만 나의 경험담을 통해서 누군가는 조금의 지식을 얻을 수 있고, 또 누군가는 조금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 같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방식의 삶이 존재하고, 그 모든 삶이 전부 틀린 것이 아니기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겪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시행착오를 하거나, 주저함으로 인해 놓쳐버릴 수 있는 것들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면 조금은 낭비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마치 거창한 일을 해낸 것처럼 포장해서 글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분명 그런 것 같아 조금은 부끄럽다.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유학길에 오른 것도 아니고, 남들보다 특별히 잘나서 공부를 오래 한 것도 아니다. 지금의 내 모습이 성공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대단한 사람이 된 것도 아니다. 당신이 쉽게 볼 수 있는 보잘것없는 친구 중 한 명과 아주 비슷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현실에서 나만큼 완벽하게 보잘것없는 사람도 드물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긍정적이고 조금은 더 유쾌하다는 것 외에는 특별히 잘난 구석이 전혀 없다. 이런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내가 했으니까 당신도 할 수 있다!'이다.     

어학연수와 유학 기간 동안 달라진 환경과 학교 공부에 적응하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고 스트레스도 받았지만, 결국은 졸업장을 따냈다. 공부에 올인하지도 않아서 훌륭한 성적도 아니었다. 졸업 점수가 뭐가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특별하게 잘난 구석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나였지만 어쨌든 5년이라는 유학 생활을 마치고 목표로 하는 취업을 이루어 냈다. 엄청나게 좋은 회사는 아니지만 대기업도 떡 하니 붙었다. 노력하는 만큼 즐기기도 많이 했다. 그러니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만 볼 것도 아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앞서 이야기했다. 내가 기울인 노력에 비하면 지금의 내 모습은 아주 적절하다. 아니 적절하다 못해 아주 칭찬할 만하다. 노력의 보답은 확실히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나보다 더 높은 목표를 세운 당신이라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목표는 나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을 만큼,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목표여야 한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성적을 내서 더 좋은 곳에 취업하는 것이 당연히 좋겠지만, 사람마다 주어진 노력의 역량이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비싼 돈 내고 유학길에 올라 365일 내내 공부만 해도 부족할 판이었지만, 나라는 사람에게는 공부에 투자할 그 정도 노력의 역량이 없었다. 다양한 곳에 눈을 돌려보았고, 다양한 일을 겪으면서 많은 양의 경험이 쌓였다. 와이프가 알면 거품 물만큼 달달하게 연애도 했다. 그래서 지금의 와이프를 만나 행복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일련의 몸부림으로 내가 가고 싶은 길이 무엇인지, 나라는 사람의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 찾아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나의 유학 생활은 성공적이었다. 각자 자기가 가진 노력의 역량을 판단해 보고 그에 따라 목표를 세우고 좇아간다면 언젠가 그 목표를 이루는 날이 올 것이다.     

스스로의 역량을 너무 과소평가하지는 말자. 주구장창 공부만 하라는 말도 아니고 반드시 유학을 떠나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지만, 당신이 가지고 있는 역량의 한계를 미리 축소할 필요는 없다. 해보고 싶은 일이 있는데 실패할까 봐 주저하는 일이 있다면 한번 부딪혀 보라. 나의 노력의 역량이 얼마인지는 부딪쳐 보아야만 알 수 있다. 한 번쯤은 치열하게 노력을 해보아야 나에게 주어진 노력의 역량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 내가 가진 노력의 역량이 얼마나 큰지 스스로 피 터지게 확인하기 전까지는 당신의 역량을 한번 믿어보라. 한국 사람이 가진 노력의 역량은 생각보다 크다. 웬만한 목표는 달성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 2002년 월드컵에서 4강까지 올라갈지는 누가 알았으며, 내가 런던대 석사가 될 줄은 어느 누가 알았겠는가!(내가 석사를 했다는 것이 그만큼이나 대단한 일이다) 당신이 특별히 잘날 사람이 아니라도 할 수 있다. 나의 경험이 이를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지금의 나는 아직 회사에서의 어떠한 성공도 거두지 못했다. 성공은커녕 현상 유지만도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지금 내가 있는 길의 끝에 처음 회사에 입사하며 세워둔 목표인 유럽 법인장이라는 모습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곳으로 가는 길이 일직선으로 놓인 것은 아니고, 그래서 한참을 돌아 돌아 찾아가야 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직 아무런 이정표도 나타나지 않으니 불안할 따름이다. 하지만 나는 지쳐있지 않다. 나는 아직도 걸어가고 있고 내가 가는 그 길 끝에 설령 유럽법인장이나 지역전문가라는 달콤한 보상이 있지 않더라도 내가 가는 길이 실패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이 걷고 있는 지금의 이 길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의 목표에 대해 최선을 다한 치열함을 쏟는다면 언젠가는 목표를 달성하는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치열하게 노력하자. 치열하게 고민하다 보면 방법이 보일 것이다. 가는 길이 험하고 멀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 길에 반드시 보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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