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무일반 - 협의: 사전시뮬레이션
실무일반편 목차
1. 거절설득
2. 프로젝트 진행
-> 이번글:3.협의: 사전 시뮬레이션
1. 예상치 못한 요청, 불쾌한 감정
저는 예산팀의 김대리입니다.
어느 날 팀장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기획실에서 업무 협조 요청이 왔다는데,
나도 정확한 내용은 잘 모르겠어.
일단 오늘 회의에 들어가보게.”
곧바로 오후 2시 회의 초대 메일이 도착했고,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회의 내용을 듣고 보니,
다소 당황스러운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기획팀에서 리더십 강화용 직원 평가제도를 준비했고,
이미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고 하더군요.
이제 예산만 확보되면 실행에 옮길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필요한 규모는 X억 원 수준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들을수록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해당 안건은 리더십에 올리기 전,
예산팀과 아무런 협의가 없었다고 합니다.
기획팀의 설명은
“역량평가 관련 부정적 소문이 돌까 봐 기밀로 처리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솔직히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를 배제하고 일방적으로 결정해놓고,
이제 와서 “어떻게든 예산을 마련해달라”는 식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리더십에 이미 안건이 올라가 있는 상태라,
예산팀이 반대 입장을 보이면
**‘예산팀이 비협조적이어서 무산된 안건’**처럼
비춰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럴 때 저는,
과거 북미에서 함께 일했던
리드엔지니어 J가 종종 떠오르곤 합니다.
그는 은퇴를 앞둔 베테랑이었지만,
제가 본 사람 중 가장 두뇌 회전이 빠른 인물 중 한 명이었습니다.
문제 해결 능력은 탁월했지만,
말투는 매우 직설적이고 성격도 다혈질이었습니다.
프로젝트에 투입되면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을 던졌습니다.
담당자에게는
“당신이 이걸 몰랐다는 게 말이 돼?”라는
식의 말이 오갔고,
협력사 직원 중엔
울면서 퇴사한 경우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저 역시 그의 말투에 힘들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의 말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최대한 차분하게 듣고,
정리해서 실행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조심스럽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J, 제가 다른 사람들과 좀 달랐던 점이 있었나요?”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습니다.
“넌 감정 컨트롤을 잘해.
그래서 너랑은 끝까지 일할 수 있었던 거야.”
그 말이 저에겐 꽤 인상 깊게 남았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 저는 회의 자리에서
‘첫 감정’에 즉시 반응하지 않기를 스스로의 원칙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60% 긍정 + 40% 현실
예산팀의 이번 상황에도
이 원칙을 적용해볼 수 있을 듯합니다.
겉보기에는 공손한 협조 요청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사전 협의 없이 진행된
사실상의 통보로 느껴졌고,
부정적으로 반응하면
우리 팀에 불리한 인상이
남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럴 때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지금은 예산 감축 기조라 신규 집행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기분이 상했다 → 도와주고 싶지 않다 → 그래서 안 되는 이유를 먼저 말한다’는 순서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상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걸 몰라서 부탁했겠나?
안 될 이유 말고, 될 방법부터 생각해봐야지.’
그렇다고 해서 감정을 숨기고 곧바로 수락하는 것도
장기적으로는 좋은 대응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네, 최대한 마련해보겠습니다. 뭐 언제 우리가 편하게 한 적 있나요. 해보죠.”
이런 태도는 단기적으로는 좋아 보일지 몰라도,
반복되면 이런 방식의 요청이 표준 절차처럼 굳어질 위험도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방식으로 대응해보곤 합니다.
“상황 잘 알겠습니다. 좋은 취지의 제안이네요.
저희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빠르게 내부 논의 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한 마디 더합니다.
“이런 사유로 가능성은 60% 정도 보입니다.
다만 내부 사정상 이런 부분에서 약간의 저항도 있을 수 있어서요.
내일까지 회신드리면 괜찮을까요?”
여기서 60%는 나 개인적으로는
일이 되게 하고싶다는 느낌,
40%는 불확실성을 감안한 여지를 남기는 태도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하면 혹시나 결과가 부정적으로 나더라도
“처음부터 확정된 게 아니었지”라는 인식이 남아
불필요한 오해를 줄일 수 있는 듯합니다.
(거절시에는 실무일반:거절법 참조)
반대로 기획팀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케이크나 커피를 사들고 간다거나,
“갑작스럽게 요청드려 죄송합니다”
같은 말은 분명 예의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무 현장에서
그보다 더 자주 쓰이는 방식이 있습니다.
바로 이 한마디입니다.
“리더십에서 요청한 건이라…”
표면상으로는 공손하게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는 권위를 앞세워 이미 결정된 일처럼 압박하는 말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예산팀 입장에서는
“이미 윗선에서 정해놓고
왜 지금 와서 협의라고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기 쉽습니다.
이런 방식은 협의가 아니라
사후 통보로 받아들여지고,
상대에게는 오히려
무력감과 거부감만 남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기획팀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라면 리더십에 최초 제안하기 전에,
기획팀장님께 이렇게 제안드렸을 것 같습니다.
“기밀인 건 잘 알지만, 목적은 밝히지 않고
예산팀에 사전 조율 정도라도 해보면 어떨까요?
리더십에서도 실행 가능성을 물어보실 텐데,
그때 팀장님께서 ‘이미 조율 중’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시잖아요.”
그렇게 허락을 얻은 뒤,
예산팀과의 회의에서는 이렇게 말했을 듯합니다.
“자세한 목적은 지금 공유드리기 어렵지만,
필요한 시기와 대략적인 예산 규모는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미리 조율드리고 싶어 자리를 요청드렸습니다.”
물론 예산팀 입장에서는
목적도 모르는 상황에서
예산을 선뜻 확보하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시점에는
정식 승인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친 뒤,
리더십의 가승인을 받은 후
다시 예산팀에 정식 요청을 드리게 된다면,
예산팀의 반응은 분명 달라질 수 있습니다.
“아, 그때 그게 이건가요. 미리 말씀 주셨었죠.”
이렇게 되면,
사전에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협의하려 했다는 존중의 메시지가 전달되고,
상대 입장에서도 긍정적으로 응답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질 듯합니다.
미리 그려보는 시뮬레이션입니다
협의는 감정싸움이 아니라,
전체 흐름을 미리 시뮬레이션하고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협의할지를
미리 고민하고 정리하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한두 걸음 먼저 생각해보는 태도.
이런 준비가 결국
협의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핵심 기술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