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렇게 “지시해주는” 상사가 최고: 척척맞는 팀이 되기

보고와 지시1편: 말 한마디가 결과를 바꾼다

by 마찌

“이걸 왜 이렇게 했어?”

그 말 한 방에, 하루치 자존감이 무너졌다.


퇴근 10분 전, 팀장이 내 자리를 지나가다 말했다.
“잠깐, 컴퓨터 좀 봐줄래?”

아, 이거구나.
오늘 하루 머릿속을 통째로 삼켜버린 그 자료.
수정만 열 번 넘게 했던 그 파일.
그게 지금, 심판대 위에 올라간다.

팀장은 말없이 마우스를 넘겼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댔다.
그리고 마침내 멈춰선 화면.


“이건 왜 이렇게 정리한 거야?”
“업무 목적을 잘 이해 못한 것 같은데?”
“이렇게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 말은 마치,
‘넌 지금 엉뚱한 언어로 말하고 있어’라는 선고처럼 들렸다.

나는 굳은 채 서 있었다.
머릿속엔 몇 마디 지시만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거 저번처럼 하면 돼. VOC 참고해서.’

그게 전부였고,
그걸 붙잡고 혼자 끙끙대며 만든 자료였다.
눈감고 미로를 푸는 느낌이었다.

그날 밤, 머릿속은 리플레이의 늪에 빠졌다.
‘왜 자꾸 이런 일이 반복되지?’
‘내가 그렇게까지 멍청한 걸까?’

그러다 우연히 읽은 책 한 구절이 눈에 박혔다.


“지식의 저주(Curse of Knowledge)”


알면 알수록, 설명이 짧아진다.
머릿속 그림이 너무 선명한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는다.

그래서 말은 생략되고, 기대만 남는다.


“그거 저번처럼.”
“지난 VOC 참고해서.”


듣는 사람은 그 ‘저번’도, 그 ‘VOC’도 모른다.
말은 짧은데, 해석은 길다.
지시를 받고도 매번 ‘다시’ 만드는 이유, 거기 있었다.

그제야 감이 왔다.
문제는 지시가 아니라,

내가 뭘 모르는지를 몰랐던 나였다.


그 뒤로 난,
지시를 들을 때마다 오른손부터 꺼내는 습관이 생겼다.


진짜 오른손.
엄지부터 새끼손가락까지 하나씩 접으며 체크했다.

누가? (누구에게 보여줄 자료인지)

언제? (언제까지인지)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쓸 건지)

무엇을? (무슨 산출물이 필요한지)

어떻게? (형식이나 기준은?)

왜? (목적은 뭔지)


이걸 ‘머릿속으로’만 확인하지 않고,
실제로 손가락을 펴고 접어보면 이상하게도 빈칸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날, 팀장이 다시 말했다.


“내일부터 휴가니까 니가 리드를 좀 도와줘.
A 프로세스 계산 다시 해야 하거든.
K 상무님 쪽에서 오늘이나 내일 기준 수치 줄 거야.
그걸로 원가 자료 만들어.
다음 리더십 회의에 들어가야 해.”


나는 속으로 손가락을 접었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들렸다.

그런데 ‘언제까지’가 빠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다음 주 초까지 마무리해서 넘기면 될까요?”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깜빡했네. 모르는 건 리드랑 조율하고.”


그날, 내 안에서 무언가 바뀌었다.
이젠 지시가 애매하다고 속으로 욕하지 않았다.
대신, 내가 먼저 ‘기준’을 제안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 후로 나는 몇 가지 원칙을 익혀갔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매번 실수를 되감아보며 내 손으로 정리한 원칙들이다.


내가 스스로 터득한 지시 대응법


✔ 무조건 메모한다.
“기억하려 했는데요…”는 상사의 망치를 부르는 주문이다.


✔ 손가락 체크리스트로 빠진 구멍을 잡는다.
깔끔한 필기보다, 허술한 시작을 막는 게 우선이다.


✔ 애매한 지시는 요약해 되묻는다.
“그럼 A 기준으로 정리해서 다음 주 초까지 드리면 되는 거죠?”


✔ 누락된 정보는 부드럽게 캐묻는다.
“혹시 이건 고객용인가요? 내부 회의용이면 구성 조금 다르게 가야 할 것 같아서요.”


✔ 중간 초안을 보여준다.
복잡한 일은 마감 20% 시점,
단순한 일은 80% 시점.
방향이 틀어지기 전에 바로잡는 골든타임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지시를 주는 입장이 되었을 때도 나는 이렇게 했다.


나중에 내가 지시할 때 지켜온 습관


✔ 손가락 5개는 늘 챙긴다.
누가 / 언제 / 어디서 / 무엇을 / 어떻게 / 왜


✔ 상대가 메모 안 하면, 내가 정리해서 보낸다.
“방금 얘기한 거, 제가 요약해서 메일로 보낼게요.”


✔ 리뷰 타이밍을 함께 정한다.
“목요일 마감이니까, 화요일까지 초안 주세요.”

→ 시간만 말하지 말고, 품질과 기준도 함께 건네야 통한다.


연습해봤다, 머릿속으로라도.


“지난번 A이슈 말이야.
그거 정리해서 오늘 퇴근 전까지 공유해줘.
표나 그래프 써서 보기 편하게.
어제 온 VOC도 참고해서.”


‘누가’ 볼 건지,
‘왜’ 필요한지, 빠져 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묻는다.


“고객용 보고인가요?
아니면 내부 회의용인가요?”


목적을 모르면, 방향도 없다.
요즘 나는 그걸 안다.


마무리


이제 나는 지시를 받으면 바로 오른손부터 꺼낸다.
그리고 문득,
과거의 나를 떠올린다.

‘그거 왜 이렇게 했어?’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그 얼얼한 느낌.

그 한 마디를 들을 일이 줄어들자,
자연스럽게 누군가는 나를
“말 안 해도 알아듣는 사람”이라 불러주었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말이 잘 통하는 상사”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시가 무섭지 않게 되는 순간,
일이 조금씩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keyword
이전 28화미국에서 매일 쓰는 직장인 필살 알짜 영어표현 모음집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