믹서기가 고장났다

그 공백을 그대로

by 오늘


15년 전 결혼 선물로 받은 믹서기가 얼마 전 갑자기 작동되지 않았다.



이런 경우 미니멀리스트라면 드는 두 가지 생각.


하나, 물건이 집에서 또 하나 나가는구나. 짜릿함.


둘, 그럼 내 사랑 고구마라테는 어떻게 해먹지? 아쉬움.




대용량과 소용량 두 가지 기능이 가능한 믹서기였지만 거의 작은 용기만 사용했다. 그동안 자주 쓰지 않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집에서 잘도 버텨 왔네. 집에 15년 된 물건은 별로 없는데 말이다.



이렇게 된 김에, 믹서기 없이 살아보기 실험해 볼 수 있겠다. 갈아먹는 주스는 식사 대용으로 간편하고 참 좋았는데 아쉽네. 믹서기가 하던 역할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다. 생과일은 그대로 먹는걸로 하자. 없이 살다가 불편하다거나 너무나 갖고 싶다거나 하면 새로 구매하겠지만, (새로 사게 되면 미니 일인용으로 사야지) 과일을 갈아 주스를 해 마시든. 고구마를 갈아 마시든 생식을 해서 컵에 담으면 딸아이는 질색을 한다. 보기에도 좋지 않고 맛도 안 좋을 것 같다고. 케일과 견과류를 갈아서 마시면 얼마나 고소하고 쌉쌀한 맛이 좋은지. 딸은 그맛을 모른다. 건강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데, 아이는 이미 건강하니 더 이상 좋은 음식이 안 당기는 걸까? 가장 아쉬운 고구마라테는 당분간 양산타워 북 카페 가서 마시는 걸로 해야겠다. 요즘은 ‘아메리카노’에 푹 빠져서 사실 아침엔 생식 안 먹은 지 꽤 되었다.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려 마시는 아침 시간을 즐기느라 케일을 사 먹은 지가 언제인지.


믹서기가 사라진 빈자리는 홀가분하다.



생각해 보니 믹서기 없이 산지 두 달이 지났다. 그동안 한 번도 쓸 일이 없었다. 없어도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처분하려는 물건이 지금 내게 필요한 물건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방법이 있다. 박스에 한 달 동안 보관을 해둔다. 한 달간 찾지 않은 물건은 처분해도 좋다. 혹시나 해서 보류해 두는 상자가 있는데 대부분 한 달간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 된다.


소형 가전을 처분할 때는 행정복지센터에 가져가면 무료로 수거해 준다. 믹서기는 처분하기 편한 물건에 속한다. 언제든 떠나보낼 때가 편한 물건이 좋다. 하지만 마지막이 힘든 물건도 더러 있다.


13년 전 그때 일을 두고두고 후회한다. 친정 엄마가 쓰던 원목 옷장을 받은 적이 있었다. 34평에 맞춘 원목 옷장은 18평 안방에 들어올 때부터 힘들었다. 사다리차를 이용하려고 불렀으나 베란다로 들여올 수 없었다. 결국 일부 분리를 해서 엘리베이터로 옮겼는데 그 좁은 방에 커다란 원목 옷장이 3분의 1을 차지했고 방은 더 좁아졌다. 침대를 넣으니 문이 겨우 열렸다. 옷장 세트를 한 번에 다 넣지 못하고 하나는 작은방에 넣었다 창문을 다 가려 작은방도 어두 컴컴하고 실제 사용 공간은 더 적어졌다. 문제는 거기서 이사 나올 때였다. 버리려니 사람을 불러 많은 돈을 지불하고 버려야 했다. 내가 원하던 디자인의 옷장도 아니었다. 집과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물건이 집에 들어와서 실제 사용 공간을 물건이 차지해 불편했고 처분할 때도 아주 어려웠다. 비용은 예상외로 많이 들었다. 그 이후 처분할 때를 생각하고 물건을 구매한다. 그때, 옷장을 받을 때는 가벼운 삶에 대해 생각해 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엄마는 내게 받은 옷장 비용 50만 원을 더해서 자신이 원하는 새 옷장을 샀다. 나는 그 옷장을 옮겨오고 버리는 비용까지 많은 비용을 지불했고 그동안 사용하면서 불편했던 것까지 더하면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뒤로 옷장을 사지 않았다. 이사 후에도 옷걸이를 걸 수 있는 뼈대만 있는 심플하고 슬림한 옷걸이를 사용한다. 방을 넓게 쓸 수 있어서 좋다. 쉽게 처분할 수 있는지 여부를 반드시 생각하고 물건을 들인다. 언제든 정리하고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미래에 사용할 자유로움을 포기하지 않는다.



[조그맣게 살 거야]의 저자 진민영님은


“쉽게 처분할 수 없는 물건은 생활 속에서도 짐이 되고 미래에는 자유를 발목 잡는다. 언제든 원할 때 처분할 수 있고 떠나보낼 수 있는 물건만을 소유하면 스트레스도 부담도 없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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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맣게 살 거야 저자 진민영 출판-책읽는고양이 발매 -2018.05.10.




내가 원하지 않는 물건은 정중하게 거절한다. 내게 선물을 해주고 싶은 친구가 있다면 원하는 품목을 정확하게 알려준다. 원하지 않는 선물을 받으면 참 곤란하다. 나는 사용하지도 않을 것이고, 누구에게 주기도 그렇고 받게 되는 그 누군가도 원하지 않은 물건 일지 모르니 말이다. 그래서 선물을 주고받기보다 시간을 함께 보내거나 작품을 관람하거나 경험을 공유하는 일을 좋아 한다.


믹서기가 떠난 자리는 홀가분하면서도 기분 좋은 여유를 선물해 주었다. 잠시 그 공백을. 자유로움을 머금은 채로 그대로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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