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무드 세 친구 이야기
유대인의 율법과 전승을 담은 탈무드에 죽음에 관한 세 친구 이야기가 나온다. 옛날 어떤 왕이 한 남자에게 사람을 보내어 곧장 궁에 들어올 것을 명했다. 그 남자에게는 세 친구가 있었는데 그 중 한 친구는 그가 자신의 목숨처럼 소중히 친구이고, 두 번째 친구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좋아하는 친구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리고 세 번째 친구는 친구이긴 하지만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고 크게 관심을 갖고 지내지도 않았다.
왕의 사자가 왔으니 문책을 받고 엄벌에 처해질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그는 혼자 가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세 친구에게 동행할 것을 부탁했다. 그러자 첫 번째 친구는 단 칼에 잘라 거절했다. 두 번째 친구는 "왕궁 문 앞까지는 데려다 주겠네."라는 조건을 붙이며 궁 안에 함께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기대하지 않았던 세 번째 친구는 "물론이지. 내가 자네와 동행하겠네. 자네는 나쁜 죄를 지은 적이 없으니 내가 왕께 말씀을 드리겠네."라고 말해주었다.
이 이야기에서 입궁을 죽음의 문턱이라 치환시켜 놓고 다시 바라보면 첫 번째 친구는 '재산'이다.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더라도 죽을 때는 가지고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가족과 친지'며 화장터까지는 함께 가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나와 함께 죽음을 맞이해주지는 않는다. 마지막으로 최후까지 함께 가는 세 번째 친구는 바로 '선행'이다. 평상시 중요하게 생각지 않아 소홀히 할 수 있지만 결국 죽은 뒤에도 끝까지 남는 것은 선행뿐이니까.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사람이 죽고 육신이 썩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를 통해 세상에 남는 것은 그가 행한 선행과 사랑 그에 대한 메시지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수 없는 필멸의 존재이면서도 이를 인식하기가 힘들다. 인생에 있어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지만 삶이 천년만년 지속될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죽을 것이란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이를 수용하게 되면 삶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했을 때 중요시했던 것이 덧없어지기도 하고 신경 쓰지 않았던 것들이 유의미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에 대해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인간을 ‘진정으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현존재’라고까지 정의했다. 사람에게는 미래에 일어날 죽음의 불가피성, 죽음에 대한 변하지 않는 가능성이 명확하게 주어져 있는데 이에 대해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본래의 자기를 깨닫게 되고 삶의 진정성이 생긴다고 했다. 사람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그리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를 더해야만 인생을 보다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죽음이라는 것은 아무리 피하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해 전차를 호령하던 진시황은 권력을 누리며 불로장생을 하고자 불로초를 찾으려 다녔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36년에 걸쳐 70만 명이 동원된 거대한 지하무덤에 49의 나이로 묻힌 채 생을 마감했지 않은가? 그렇다면 현존하는 사람은 죽음이 나와 무관한 저 세상의 이야기라 여기는 대신에 죽음은 삶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 삶과 동행하고 있는 것임을 자각하는 것이 삶에 유리하다.
로마의 저술가이자 정치가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B.C 106~ B.C 43)는 달변가로 유명했지만 정작 본인은 철학자로 알려지기를 더 원했다. 자신의 생애의 진실된 목표는 철학이고 수려한 말발은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피력했을 정도다. 그랬던 그는 “모든 철학자들의 인생은 죽음에 관한 명상”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인식은 어쩌면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고 우리의 이해심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해주는 데 유용할 수 있다. 죽음은 삶을 한층 더 소중한 것으로 여기게 해주고 이로 인해 사람은 인생의 남은 시간은 악(惡)보다는 선(善)을 향해 나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이 자신의 삶 속에 내재되어 있는 죽음을 직면하고 살아가게 되면 자신의 삶을 후회 없이 보내도록 더 착하고 아름답게, 재미있고 가치 있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선행을 베풀며 세상을 보다 따뜻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인생이 나아갈 것이다.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 죽음 또한 행복한 죽음일 확률이 높지 않을까. 그래서 탈무드의 세 친구 이야기가 주는 ‘죽음’에 관한 인식은 ‘삶’을 재정의 해준다는 면에서 그 울림이 크다 하겠다.
생각해볼 문제
죽음에 대한 인식은 삶의 태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죽음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답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