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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가 JaJaKa Apr 23. 2024

그들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14화(마지막화)

#14 명수



오늘 아침에 일어난 명수는 간밤에 거의 한숨도 자지 못해서 그런지 몸이 무거웠다. 미숙은 오늘 명수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르고 있었다. 오늘 최종합격을 축하하는 자리로만 알고 나오는 미숙에게 명수는 헤어지자는 말을 할 생각이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솔직히 겁이 나지만 더 이상 뒤로 미룰 수가 없는 문제였다.     


명수는 미숙과 만나는 동안 말은 못 했지만 즐겁지가 않았다. 예전에 말을 했어야 했는데 말을 못 하고 왜 지금까지 끌고 왔나 생각을 해보면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미숙이 두렵기도 했고 혼자가 되는 것도 두려웠던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미숙과 미래를 그려보아도 그림이 그려지지가 않았다. 숨이 턱턱 막힐 뿐이었다. 애초부터 어울리지 않는 두 남녀가 너무 오랫동안 만나 온 것이다. 이제는 더 늦기 전에 끝내야 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이대로 더 가봐야 어차피 달라질 것은 없고 길은 같을 것이다.     


명수는 미숙을 만나러 공원에 가기 전에 약국에 들러 우황청심환을 사서 먹었다. 굳게 마음을 먹는다고 했지만 솔직히 떨리고 두려운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미숙과 사귀면서 알게 모르게 주눅이 든 것이 차곡차곡 쌓여서 명수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명수도 미숙도 서로 자신들과 더 잘 어울리는 상대를 만나야 그들의 미래가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명수는 결론을 내렸다. 미숙이 동의를 할지는 모르지만.     


공원 저쪽에서 걸어오는 미숙의 모습을 보자 명수는 순간 마음이 약해졌지만 다시 마음을 다 잡았다. 미숙이 얼마나 공들여 꾸미고 나왔는지 명수는 미숙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약해져서는 안 되었다. 오늘 얘기할 기회를 놓쳐버리면 명수에게 다음 기회가 언제 올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이대로 뻔히 보이는 미래에 그를 맡길 수는 없었다.     


환하게 웃는 미숙의 얼굴이 명수의 말에 한순간에 찬물이 끼얹어진 듯 일그러지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명수의 말에 미숙은 처음에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농담일 거야, 농담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러나 명수의 말이 농담이 아닌 진심인 것을 안 미숙의 얼굴은 놀람과 당황에 이어 서서히 분노의 눈빛으로 변해갔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미숙의 격앙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일부러 오늘을 기다린 거니? 일부러 이 날을 기다린 거야? 이유가 뭐야? 도대체 헤어지자는 이유가 뭔데? 왜 오늘 그 얘기를 하는 거냐고. 나는 너만 믿고 너만 바라보고 5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렸는데 지금 나한테 그게 할 소리야? 헤어지자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오니? 이 나쁜 놈아.” 


명수가 미숙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만 믿고 기다렸다고? 나만 바라보고 5년을 기다렸다고? 그런데 왜 나 몰래 맞선을 보고 다닌 거야?”   

  

맞선이라는 단어가 명수의 입에서 나오자 순간 당황한 미숙의 눈이 커졌다.     


“뭐? 뭐라는 거야?”     


“진짜 모르는 얘기야? 시치미 뗄 생각인가 본데 너 맞선 보고 다녔잖아.”     


“그, 그건 하도 엄마가 소원이라고 한 번만 보라고보라고 성화를 해서 본거야.”     


명수가 즉각적으로 목소리를 높여 되물었다.     


“한 번이라고?”     


명수의 즉각적인 물음에 미숙이 순간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두, 두 번이었나? 하여간 하도 성화를 하는 바람에 그냥 나간 거야. 너 공부에 방해될까 봐 일부러 말 안 한 거였어.”     


“맞선에 나온 사람이 네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나 같은 놈은 진즉에 헌신짝 버리듯이 차 버렸겠지.” 


“아니야, 그건 아니야.”     


“미숙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고 나서 말해. 맞선에 나온 사람이 대머리가 아니고 키가 너무 작지만 않았다면 너는 그 남자를 선택했을 거야. 우리 다른 것은 몰라도 양심은 속이지 말자.”    

 

명수의 말에 미숙의 눈가가 살짝 떨렸고 그녀의 입술이 열릴 듯 말 듯하다가 이내 할 말이 없다는 듯 꾹 다물었다.     


벤치에 주저앉은 미숙이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명수가 아는 미숙은 저렇게 약한 여자가 아니었는데, 하고 생각하며 미숙을 쳐다보는데 갑자기 미숙이 벌떡 일어나 명수 앞으로 다가섰다. 순간 흠칫 놀란 명수가 숨을 들이쉰 채 머리를 떨구었다.      


발악적인 미숙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명수는 어느 순간 날아올 귀싸대기를 맞을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귀싸대기는 날아오지 않았다.      


울면서 소리를 지르는 미숙의 말이 공원에 울려 퍼졌다.     


“나랑 헤어지고 싶으면 지금까지 참지 말고 진즉에 얘기하지, 왜 여태 참았니. 미리 말해주었으면 지금까지 나 같은 여자를 만나지 않았어도 되었을 테고 나도 너 같은 허접한 놈을 지금까지 만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5년이나 기다린 여자에게 겨우 한다는 소리가 헤어지자는 거니? 시험 합격했다고? 정말 웃긴다. 너 같은 놈을 내가 그래도 한때 사랑했다는 게 정말 수치스럽다.”     


“사랑?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있어? 그래?”  


“지금 너 뭐라는 거야? 그럼 내가 사랑도 하지 않는 놈을 지금까지 만났다는 거야? 네 말을 들어보니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얘기잖아. 그러고도 어떻게 그 오랫동안 나를 만나서 섹스를 했니? 그냥 여자 몸이 필요했던 거였어? 사랑도 하지 않는데? 그래서 연기를 했던 거야? 사랑하는 척? 너 진짜 대단한 놈이구나.”  

   

“괜한 억지 부리지 마.”     


“뭐? 괜한 억지를 부리지 말라고?”     


“그래, 지금은 아니지만 너를 사랑했던 적은 있었어.”     


“뭐? 지금은 아니지만 사랑했던 적이 있었다고? 잘도 주워대네. 내가 이 꼴을 당하려고 5년을 기다린 게 아닌데. 주위에서 다 가망 없다고 헤어지라고 하는 얘기에도 꿋꿋하게 버티고 버티었는데 결국 나에게 돌아오는 게 헤어지자는 소리라니. 하하하. 갑자기 웃음이 나오네. 하하하.”   

  

웃던 미숙이 고개를 들어 명수를 날카롭게 째려보면서 말했다.     


“이 나쁜 새끼.”     


명수는 목구멍 깊은 속에서 올라온 말을 입 밖에 내지 않고 꿀꺽 삼키었다. 명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나 끝내 말하지 않고 참았다.      


두 사람 모두 정나미가 떨어진 굳은 얼굴로 서로를 노려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어쩌면 훨씬 전부터 그들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연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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