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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가 JaJaKa Apr 16. 2024

그들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13화

#13 미숙



미숙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오늘은 명수를 만나기로 한 날이다. 어제 명수의 합격소식을 듣고 당장이라도 만나고 싶었지만 명수는 내일 보자고 했다.      


왜 그랬을까? 어제 만나야 그 순간의 기쁘고 날아갈 듯한 느낌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을 텐데.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명수의 말에 그간의 고되고 힘들었던 시간들을 혼자 음미해 보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을 했다.     


미숙은 오늘 같은 날을 위해 준비해 놓은 레이스가 달린 검은색 속옷을 꺼내어 입고 한껏 마음이 부풀었다. 이미 어젯밤에 비즈니스호텔 급으로 방도 예약을 해두었다. 오늘 같은 날에 모텔에 가는 것은 격이 떨어져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돈만 넉넉했다면 특급호텔로 예약을 했을 텐데 형편상 특급호텔은 못되더라도 비즈니스호텔 급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 명수에게 호텔에 예약을 해두었다는 말을 전하면 표가 나지 않게 스물스물 명수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질 모습을 생각하니 얼른 명수가 만나고 싶어졌다.     


오늘은 날이 날인만큼 명수가 좋아하는 생고기로 그것도 소고기로 양껏 푸짐하게 먹고 그리고 바로 비즈니스호텔에 들어가서 검은색 속옷을 입은 모습을 보여주면 명수가 짐승처럼 달려들 것만 같은 상상에 괜히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미숙은 오늘 명수와 보낼 잊지 못할 뜨거운 시간을 상상하면서 명수와 만나기로 한 공원을 향하는 발걸음이 마치 처음 만나던 그때처럼 설레면서 긴장되었다.   

   

‘오늘 같은 날 왜 공원에서 만나자고 한 거지? 이렇게 기쁜 날에 말이지. 찻집에 들어갈 돈을 아끼려고 갔던 공원에서 왜 보자고 한 걸까? 날씨가 좋아서 시원한 야외에서 만나고 싶었나 보네.’     


한껏 들뜬 표정으로 최대한 차려입고 나온 미숙이 공원에 도착했을 때 명수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미숙이 명수를 보고 손을 흔들며 걸어가는데 이상하게도 명수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지 않았다.     


그리고 몇 분 후 미숙은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들었다.     


“우리 헤어져. 너랑 헤어지고 싶어.”     


공원에 오기 전까지 오늘 계획한 일들을 상상하며 너무나 기쁘고 설레던 미숙의 마음은 명수의 말에 의해 한순간에 처참하게 무너졌다. 괜한 농담은 아닐까 하고 명수를 쳐다보던 미숙의 눈에 명수의 단호하면서도 굳은 얼굴표정이 그냥 지나가는 길에 하는 농담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도 확연하게 느껴졌다.     


“농담하는 거지? 농담하는 거라면 그만해. 오늘은 축하해 주러 나온 날이잖아.”     


“농담 아니야. 오랫동안 고민한 거야.”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했으나 마음이 진정되지가 않았다. 합격을 축하하러 나온 날에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마치 오늘만을 기다렸다는 듯 덤덤하게 말하는 명수의 얼굴을 보니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농담이잖아. 농담이라고 말해.”     


순간 미숙의 목소리가 커졌다. 미숙도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오늘 이 자리를 위해 내가 얼마나 신경 써서 예쁘게 차려입고 나왔는데.     


“이유가 뭐야. 도대체 이유가 뭐야? 도대체 너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 어떻게 나한테?”   

  

미숙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소리를 지르는데도 명수는 덤덤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이렇게 냉혹한 자식이었나 싶을 정도로.     


“말해 봐. 말해보라고? 도대체 이유가 뭐야? 너 경찰공무원 합격하자마자 나한테 헤어지자고 하는 이유가 뭐야? 야, 내 말 안 들려?”     


힐긋힐긋 쳐다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지만 미숙은 지금 그 사람들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나는 이제 지쳤어.”     


겨우 입을 열고 한다는 소리가 지쳤다는 명수의 말에 미숙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는 너랑 만나는 내내 말은 하지 않았지만 힘들었어. 이제 지치고 힘들어서 더 이상 못하겠어.”     


“뭐? 나랑 만나는 내내 힘들었다고? 지쳤다고? 그게 할 소리야? 나한테? 5년이나 별 볼일 없는 널 기다린 나한테?”     


미숙은 가슴이 울렁거리고 갑자기 기운이 빠져서 벤치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오늘 같은 날에 이런 개떡 같은 얘기를 듣게 되다니.     


“왜 진즉에 말을 하지 그랬니? 왜 오늘까지 참은 거야? 일부러 합격할 때까지 기다린 거야? 엿 먹이려고? 이 새끼야, 말해 봐. 말을 해보라고. 그런 거니? 그런 거야?”     


“아니야. 이번에 떨어졌어도 말을 하려고 했어.”


“지랄하고 있네. 이번에 떨어졌으면 아무 말도 못 했을 주제에.”     


미숙은 앞에 서 있는 명수를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5년이나 기다린 사람에게 겨우 한다는 말이 지쳤다고? 헤어지자고? 그냥 웃음만 나왔다. 정말이지 웃겨서 나오는 웃음이 아니라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이지 터무니없이 어이가 없을 때 웃음이 나온다고 하던데 정말 그랬다.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고 얼굴은 어이없어 웃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미숙에게 일어나다니.     


지금 앞에 서 있는 명수의 얼굴이 미숙이 그동안 알던 명수의 얼굴 같아 보이지가 않았다.    

  

‘이런 놈인지도 모르고 그동안 기다렸다니, 이런 놈을 믿고 5년이나 기다렸다니, 이런 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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