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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가 JaJaKa Apr 09. 2024

그들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12화

#12 명수



명수는 아침부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최종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 그는 너무나 긴장이 되어서 화장실에 벌써 몇 번이나 갔다 왔는지 모른다.      


이번에는 느낌이 좋은데, 정말 느낌이 좋은데. 그런데 이렇게 느낌이 좋았던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는 불합격입니다,라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입맛이 없어서 아침도 먹지 않은 명수는 합격자 발표가 예정된 시간까지 느리게 흘러가는 시계만 바라볼 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그중에 미숙의 얼굴이 떠오른 순간 명수의 마음이 무거웠다. 요 며칠 동안 미숙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을 한 명수는 미숙과의 관계를 어찌해야 할지 고심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전 11시가 가까워질수록 명수는 자신의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맞잡은 두 손바닥에서는 땀이 배어 나왔다. 그가 조심스레 떨리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수험번호를 입력하고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는 순간 명수의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처음으로 축하합니다,라는 멘트가 그에게는 현실이 아닌 꿈처럼 느껴져서 명수는 자신의 볼을 손으로 꼬집어야 했다. 바보같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려 잠깐 동안 엉엉 울었다. 이게 뭐라고, 이게 뭐라고 그동안 자신을 이렇게 힘들게 했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명수는 자신의 앞에 꽂힌 책들을 바라보며 이제 이 책들과도 작별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섭섭함은 전혀 없고 시원하기만 했다. 그의 손때가 묻어서 군데군데 지저분해진 책들을 보고 있자니 그의 마음속이 뜨거워졌다.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듯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참 길고도 긴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면서 얼마나 많이 절망하고 소리 죽여 울었던가. 이제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속 어딘가 막혔던 곳이 뻥하고 뚫리는 것만 같았다.     

 

명수는 잠시 마음을 진정시킨 후 합격소식을 전하기 위해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그의 합격소식을 들은 미숙의 반응은 정말로 뜨거웠다. 마지막에 자신의 공을 잊지 말고 부모님에게 은근슬쩍 전달하라는 말을 빼고는. 


명수가 시골에 계신 부모님에게 합격소식을 전하자 수화기를 통해 늙은 부모님의 울먹거리는 소리가 전해져 명수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앞으로 걱정시켜 드리는 일 없이 효도하겠다는 명수의 말에 그의 부모님은 이제야 한시름 덜었다는 듯 크게 기뻐하셨다.     


명수는 아는 사람들에게 합격소식을 전하고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옥상에 올라가 불어오는 바람을 쐬고 있을 때 그의 휴대폰이 부르르 울렸다. 그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확인하자 화면에 미숙의 이름이 떠 있었다. 잠깐 망설이던 명수가 휴대폰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다 연락했어? 다들 기뻐하시지?”     


“응, 부모님은 눈물을 흘리시더라.”     


“그러실 거야. 나도 눈물이 핑 돌더라. 그나저나 우리 만나서 파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오늘 같은 날 이대로 넘어가서는 안 되는 거 아냐?” 


“괜찮으면 오늘 말고 내일 보면 어떨까?”   

  

“내일? 오늘 말고? 오늘은 뭐 하려고?”     


“오늘은 혼자서 조용히 보내고 싶어서.”     


“혼자서 조용히 보내고 싶다고?”    

 

“그냥 그러고 싶어. 내일 봐도 괜찮지?”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지금 누가 불러서 가봐야 해. 끊어.”     


명수는 서둘러 휴대폰의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고서 아무도 없는 옥상을 둘러보았다. 누군가가 피고 발로 눌러 끈 담배꽁초가 구석에서 뒹굴고 있었다. 명수는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지 자리를 뜰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저 멀리 보이는 남산타워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5년 동안의 만남. 우리는 왜 아직까지 서로를 만나고 있을까?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사랑이라는 감정이 믿음과 신뢰가 바탕이 되어 형성된다고 한다면 나는 미숙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지난 5년이라는 시간, 그리고 앞으로 50년이라는 시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내 앞으로의 50년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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