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꼬마 숙녀 윤지 1

by 자작가 JaJaKa

커튼 사이로 벌어진 틈을 통해 아침 햇살이 수현의 얼굴에 비추었다. 수현은 일어나서 커튼을 제대로 치고 싶지만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새벽녘까지 글을 쓰다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제대로 커튼을 치지 않아 아침 햇빛 때문에 잠에서 깨니 기분이 언짢았다. 수현은 얼굴을 찡그린 채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리고 다시 잠을 청해보려 했지만 한번 깬 잠은 다시 오지 않았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수현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커튼을 힘껏 옆으로 밀었다. 그의 방으로 아침 햇살이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햇빛이 비친 곳에서 가는 먼지들이 유유히 떠다니며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저 많은 먼지들이 도대체 매일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참으로 궁금할 따름이다. 아무리 쓸고 닦아도 조금만 지나면 또다시 먼지들이 쌓이는 것을 볼 때면 도대체 저 먼지들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궁금했다.


수현은 잠옷을 입은 자신의 몸에 비치는 아침 햇살에 가만히 몸을 내맡겼다. 따뜻한 뭔가가 온몸을 휘감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나뭇잎이 햇빛을 받아 광합성 작용을 하는 것처럼 그도 아침 햇빛이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렇게 서 있었다. 마치 나무가 된 것처럼.


잠시 그렇게 서 있던 그는 거실로 나가 3인용 소파에 철퍼덕하고 앉았다. 이럴 때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따뜻한 커피 한잔을 타다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했지만 자신 혼자 사는 집에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


결국 그가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가서 물을 끓이고 머그컵에 커피 분말을 붓고서 펄펄 끓은 물을 머그컵에 가득 부어 그대로 식탁의자에 앉았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니 그나마 작동을 멈춘 머리가 에너지를 공급받은 듯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 오전에 할 일이 무엇이었더라. 일단 은행에 가서 처리해야 할 업무를 오늘 당장 처리를 해야 했다. 그동안 미루고 또 미루고 있었던지라 오늘은 어떻게든 처리를 해야 했다. 그리고 은행에서 오는 길에 세탁소에 들러서 맡긴 옷가지를 찾아와야 했다. 벌써 여러 번 세탁물을 찾아가라고, 다른 세탁물을 걸어둘 공간이 부족하다고 찾아가지 않으면 보관료를 별도로 청구하겠다며 독촉하는 바람에 오늘은 세탁소에 들러서 드라이클리닝을 맡긴 옷가지를 찾아와야 했다. 그리고 또 무엇을 해야 했더라......


오늘 또 뭘 해야 하지?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수현은 아이 몰라, 나중에 생각이 나겠지, 라고 생각하고 남은 커피를 후루룩 마시고는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나면 한결 개운해질 것이다.


수현이 은행에서 미루어 두었던 볼일을 처리하고 나서 아파트 단지 상가에 있는 세탁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는 길에 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마치 밥때가 지났는데도 왜 밥을 넣어 주지 않냐며 고함이라도 지르는 듯이 그의 배에서 소리가 서라운드로 울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일어나서 커피 한잔만 마셨을 뿐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순간 허기가 몰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서 있을 힘도 없을 정도로 심하게 배고픔이 밀려오는 순간 그는 세탁소에 들르기 전에 근처 김밥 가게에서 김밥이라도 포장을 해서 가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가까운 김밥 가게에서 김밥 두 줄을 사서는 만족한 듯 비닐봉지를 흔들며 세탁소로 향했다.

사장이 수현에게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까지 늦게 찾아가면 공간도 협소한데 우리는 어떡하라고 그러는 거냐고 한소리를 했다. 그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사정상 그리 됐는데 앞으로는 그럴 일이 절대 없을 거라고 말하고서는 얼른 세탁물을 가지고 나왔다. 가게를 나오는데 따가운 시선이 그의 뒤통수에 내리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오가는 길에 진즉에 찾아왔으면 별 말을 듣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의 게으름 때문에, 귀차니즘 때문에 오늘도 또 한 소리를 듣고 말았다.


수현은 깨끗하게 세탁이 되어 다림질까지 완벽하게 된 비닐에 싸인 옷가지를 들고 그가 사는 302동으로 걸어갔다. 막 카드키를 대고 1층 출입구의 현관문을 들어서려는데 마침 누군가가 현관문 안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가 그들을 지나쳐 현관문으로 들어서려는데 그를 지나쳐 지나가던 한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그를 불러 세웠다.


“저 혹시...... 진수현 씨 아니세요?”


그가 순간 걸음을 멈추고서 뒤를 돌아보니 아이의 손을 잡은 한 여자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더니 “맞네, 맞아. 진수현 맞지? 나야 나 이경숙” 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다가왔다. 그가 이경숙이라는 이름의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니 대학교 때 같은 과 동기였던 경숙의 얼굴이 떠올랐다.

“야, 이게 얼마만이야? 수현이 너 군대 간다고 송별회 할 때 보고서 처음 보는 것 같지?”


“이경숙? 영문학과 블루진 이경숙?”


그의 말에 그녀가 배시시 웃음을 터트리더니 말했다.


“그래 블루진 이경숙. 기억나니?”


“옛날에도 말랐던 것 같은데 지금은 더 마른 것 같아.”


“그래? 살이 안 찌는 체질 인가 봐. 솔직히 먹고사는 게 힘이 들기도 하고.”


수현은 예전 경숙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늘 청바지를 입고 다녔다. 바지가 청바지 밖에 없는 사람인양 늘 청바지에 라운드 티나 남방을 걸치고 다녔던 경숙을 과 친구들은 블루진이라고 불렀을 정도다.

언제나 그 시절에 청바지를 입고 다니던 경숙은 청바지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 외에 입을 마땅한 옷이 없어서 청바지를 고집했다는 얘기를 나중에야 들었다. 그런데 경숙의 청바지 입은 모습은 참 잘 어울렸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다른 여자 동기생에 비해 마른 편이었던 그녀가 청바지를 입은 모습은 굉장히 예뻤다고, 테가 난다고 남학생들 사이에서 얘기가 오가곤 했다.


그런데 그녀가 다른 동기 여학생들에 비해 말랐던 것은 제대로 끼니를 챙겨 먹지 못해서, 너무나 바쁜 일정으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서 그렇다는 말을 우연찮게 들었던 것 같다. 늘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바빴고 수업이 끝나면 어느샌가 사라져 버리고는 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그랬다는 얘기를 들었다. 집안 형편상 본인이 생활비며 등록금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처럼 학창 시절의 낭만을 즐기며 사는 것은 그녀에겐 먼 나라의 일이었다.


언제나 긴 생머리를 끈으로 질끈 동여매고 다녔던 경숙은 짙은 쌍꺼풀에 눈이 크고 코가 오똑하고 턱 선이 갸름한 것이 서구적인 미인처럼 생겨서 과 남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지만 그녀가 아르바이트로 너무 바쁘게 지내다 보니 그녀와 제대로 얘기를 나눠보지 못했다. 수업시간에 잠깐 보고 늘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그런 예쁜 여학생으로 그의 머릿속에 경숙의 모습이 기억되어 있었다.


그가 제대로 경숙과 얘기를 나눠본 적이 있던가? 그의 기억으로는 그런 기억이 없다. 그녀는 언제나 시간에 쫓겨서 살았다. 어떻게 그녀가 수현의 군대 가는 송별회에 참석했는지는 모르지만 정말로 이례적인 일로 기억이 되었다. 과 친구들도 그녀가 웬일로 이런 자리에 참석을 다 했냐고 다들 깜짝 놀라 했던 기억이 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참석해서 술을 생각보다 잘 마셨고 많이 웃었고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며 정말로 그 자리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이 지치고 피곤했던 그녀는 어느 순간 벽에 기대어 시끄럽고 왁자지껄한 소음에도 잠을 자던 모습이 그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때 그녀의 얼굴은 21살의 예쁘고 꽃다운 나이의 싱그러운 청춘의 얼굴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삶이 힘들고 삶의 무게가 버거운 청춘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모습이었다.






keyword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