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야 인사드려, 엄마 옛날 대학 때 친구야.”
경숙의 말에 수현은 문득 과거의 추억에서 깨어나 앞에 서 있는 꼬마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이윤지입니다.”
자그마한 입술로 또랑또랑하게 말하는 윤지를 그가 바라보았다. 똑똑해 보이는 이목구비에 깊고 큰 눈이 자기 엄마를 꼭 빼닮은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는 귀엽게 생긴 아이였다.
“그래 안녕. 반가워. 윤지라...... 이름도 예쁘고 엄마를 닮아서 얼굴도 예쁘게 생겼구나.”
수현은 한 손에는 김밥이 들어있는 검은 봉지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세탁소에서 찾아온 옷가지를 들고서 경숙의 손을 잡고 있는 아주 귀엽고 예쁘게 생긴 윤지에게 어설픈 미소를 보냈다.
그는 익숙하지 않은 미소를 지을 때마다 자신의 얼굴 근육들이 따로 움직이듯 자기의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아서 곤혹스러울 때가 많았다. 그의 엄마는 그런 그에게 시간이 있을 때마다 거울을 보며 웃는 연습 좀 하라고 할 정도였다.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무뚝뚝한 인상이 아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어설픈 그의 미소에 윤지는 초롱초롱 눈망울을 빛내며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엄마의 옛날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근데 너 여기 사니?”
“응. 너도 여기 살아?”
“아니, 여기 603호에 사는 아이의 수업이 있어서......”
그러고 보니 수현은 윤지를 잡지 않은 경숙의 다른 손에 들린 커다란 서류가방과 등에 메고 있는 배낭에 시선이 갔다. 서류가방의 무게가 그녀의 손을, 그녀의 어깨를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대학시절에도 말랐는데 지금의 모습은 그때보다 더 말라 보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서류가방과 어깨에 걸친 배낭이 뼈밖에 없는 것 같은 그녀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보는 그가 더 힘들게 느껴졌다. 경숙의 서류가방에서 시선을 떼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청춘의 짙은 그림자가 중년이 된 지금의 얼굴에도 여전히 남아 있어 보였다.
“수업?”
“응. 학습지 교사로 일하고 있거든.”
“아, 그렇구나. 근데 아이도 데리고 다니는 거야?”
경숙이 옆에 서 있는 윤지를 바라보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아이 유치원이 개원기념일이라 쉬는 날이야. 아이를 따로 맡길 데가 없어서 오늘 어쩔 수 없이 데리고 다니고 있는데 엄청 눈치도 보이고 오늘은 정말 두 배로 힘이 드네.”
말을 하는 경숙의 얼굴에서 초췌한 쓴웃음이 입가를 따라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 옆에 서 있는 윤지는 그런 엄마의 말을 들으며 자기가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 마냥 시무룩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저 나이 때 아이들에게서 보이는 천진난만한 모습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윤지는 엄마의 손을 잡고 같이 다녀야 하는 오늘의 상황이 자신의 잘못인 양 눈치를 보는 듯 했다. 그런 윤지에게 시선을 보내던 그가 경숙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럼 이제 수업 끝나고 가는 길이야?”
“응 조금 있다가 다른 수업이 또 있거든. 그 후에도 또 있고. 오늘 일이 끝나려면 아직 세 군데나 더 가야 해.”
“그렇구나.”
수현이 옆에 서 있는 윤지를 바라보며 저 아이를 데리고 앞으로 세 군데나 남은 가정에 가서 본인의 사정을 설명하고 고개를 조아리며 양해를 구하고 수업을 할 경숙을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윤지는 윤지대로 얼마나 오늘 하루가 길게 느껴질까, 하고 생각하니 그 또한 그의 기분을 착잡하게 만들었다.
“근데 네가 쓴 책 나도 읽어봤어. 제목이 ‘첫사랑은 첫사랑일뿐인 걸까’ 맞지? 정말 재미있더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어. 그것도 두 번이나 연속해서 읽었어. 나는 네가 작가가 될 줄 정말 몰랐는데...... 네가 그렇게 글을 잘 쓸 줄이야.”
수현은 자신이 쓴 책을 경숙이 알고 있고 또 읽어봤다고 하니 괜히 쑥스럽기도 하면서 내심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재미있게 읽었다니 고마워.”
“하긴 대학교 다닐 때 너는 전공수업시간에도 소설책을 몰래 펼쳐놓고 읽고는 했지. 학창 시절에 너를 생각하면 책 읽던 모습만 떠올라.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 열심히 읽던 모습이. 그러고 보니 다른 애들과 다르게 네가 유난히 책 읽는 것을 좋아했던 걸 보면 네가 일찍부터 그쪽 방면으로 재능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네.”
“내 모습이 기억이 나? 나에게 다들 별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내가 과 행사나 다른 일에 거의 관심도 없고 참여도 하지 않아서 어떤 애는 내가 같은 과인지도 몰랐다고 하더라. 하긴 내가 그때는 그랬지,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네 모습이 기억이 나. 구석진 자리에 앉아서 무슨 책인가를 열심히 보던 네 모습이...... 무슨 책을 읽나 궁금해서 뒤에서 살짝 쳐다보는데도 모르고 읽고 있더라. 어깨를 살짝 건드려서 무슨 책 읽니? 라고 물어볼까 하다가 괜히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가고는 했지. 20살 청년이 주위의 소음도 잊은 채 읽고 있는 책이 무슨 책일까?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그랬구나. 처음 듣는 얘기네. 경숙이 너는 늘 시간에 쫓기고 바쁜 여학생으로만 알고 있어서 그런 네가 누구에게, 무엇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했다.”
“그랬던가? 바쁘게 지내긴 했어도 우리 과 학생이 누구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고 지냈다. 아예 관심이 없지는 않았어. 시간이 없어서 그런 것뿐이지. 그런데 그렇게 책을 좋아하던 네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줄이야. 솔직히 너무 놀랐던 기억이 나. 서점에 진열된 네 책을 보고 정말 내가 아는 진수현이 맞나 싶어서 저자 약력을 살펴보는데 내가 아는 진수현이 맞는 거야. 그때 얼마나 신기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던지...... 그 자리에서 바로 구입해서 읽어 봤어. 이렇게 만나게 될 줄 알았다면 책을 가지고 올 걸. 작가 친필 사인을 받을 좋은 기회였는데. 아쉽네.”
“뭐 그렇게 대단한 작가도 아닌데 뭘......”
“대단한 작가가 아니라니 벌써 책을 여러 권 냈고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 괜히 그러는 거 다 알아. 근데 책 속의 첫사랑은 너의 얘기야? 네가 만든 상상 속의 얘기야?”
경숙이 막 질문을 하는데 그녀 옆에 서 있던 윤지가 엄마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작게 말했다.
“엄마 나 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