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숙은 수현과의 대화에 빠져 윤지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러자 윤지가 조금은 큰 소리로 경숙의 허리춤을 잡고 흔들면서 말했다.
“엄마 나 오줌 마려. 급하다고.”
윤지의 말에 경숙이 “오줌마려?”라고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근처에 화장실이 있나 찾아보는 것 같았다. 윤지가 경숙에게 “엄마 빨리”하며 재촉을 하자 그녀가 그제야 허둥지둥하며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혹시 가까운데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아니?”
수현은 상가 화장실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가 윤지의 찡그린 얼굴과 다리를 꼬는 모습을 보자 이내 마음을 바꾸었다.
“우리 집에 갈래? 아마 제일 가까운 화장실은 우리 집이 아닐까 싶은데.”
경숙은 한시름 덜은 듯이 환해진 얼굴로 “그래도 돼?”하며 말했고 수현은 1층 출입구 현관문에 카드키를 대고는 열린 문을 향해 “들어가자” 하고 앞장을 섰다.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꼭대기 층인 15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경숙은 오랜만에 만났는데 본의 아니게 신세를 지게 되네, 라며 다소 부끄러운 얼굴을 지어 보였지만 그건 잠시뿐 수현의 아파트에 들어서자 이내 “오 깔끔하네. 혼자 사나봐.”라는 말을 하며 집을 둘러보다가 윤지의 재촉에 수현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윤지를 데리고 갔다.
윤지와 함께 화장실에 들어간 그녀가 잠시 후에 윤지를 데리고 나왔다. 윤지의 개운한 얼굴을 보니 그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화장실에서 나와서 어정쩡하게 서서 거실과 주방을 둘러보는 경숙과 윤지를 쳐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다음 수업 있다고 하지 않았어?”
수현은 이제 두 사람이 자신의 공간에서 나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화장실을 쓰게 한 친절만으로도 자신은 충분한 호의를 베풀었다고 생각을 했다. 오늘 하루 좋은 일을 하나쯤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의 말에 경숙은 시계를 보더니 “어, 그래. 서둘러서 가야겠네.” 라고 말하며 거실에 내려놓은 서류가방과 배낭을 집어 들었다. 배낭을 어깨에 걸치다가 수현의 얼굴을 바라보며 뭔가 말하기 어려운 말을 꺼내기라도 하는 듯이 혀로 마른 입술을 몇 번 훔치더니 이내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화장실을 쓰게 해 준 것도 고마운 일인데 염치없지만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16년 만에 만나서 이렇게 부탁하자니 정말 미안한데 내가 오늘 윤지를 데리고 계속해서 수업을 하러 다니자니 너무 힘들어서...... 윤지 데리고 각 가정을 방문해서 사정을 설명하며 엄마들의 싸늘한 눈치를 받아야 할 생각을 하니 너무나 암담해서 그러는데 내가 수업 마치고 윤지 데리러 올 때까지 여기에 윤지를 있게 좀 해주면 안 될까?”
수현은 경숙의 말에 순간 당황을 했다. 괜히 화장실을 쓰라는 호의를 베푼 것은 아닌지 조금은 후회를 했다. 그의 눈치를 보며 오늘 내게 제발 행운을 가져다 줘, 라고 말하듯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경숙의 얼굴과 고개를 숙이고 거실 바닥을 바라보는 윤지의 모습이 그의 까만 눈동자에 비치었다.
어제 잠을 못 잔 피곤과 배고픔이 밀려와 그의 마음에 불편한 심기가 일었다. 적당한 말로 거절을 하려던 그 순간 거실 바닥으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을 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윤지의 발 앞에 눈물방울이 떨어져 사방으로 튀어나가는 모습을 본 순간 수현은 그의 마음과 다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렇게 해. 윤지는 내가 돌보고 있을 테니 가서 수업하고 와.”
경숙은 살았다, 라는 표정을 지으며 고맙다, 고마워, 라는 말을 연신했다. 저녁 8시까지는 올 테니 그때까지 신세 좀 질게, 라는 말을 남기며 윤지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 척 한 건지는 몰라도 경숙은 윤지에게 아저씨 힘들게 하지 말고 조용히 잘 있으면 이따가 엄마가 데리러 올게, 라는 말을 남기고 무거운 가방과 배낭을 들고나갔다.
윤지는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말없이 마른 몸으로 서류가방과 배낭을 힘겹게 메고 나가는 자신의 엄마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현관문이 닫히고 나서도 그 자리에 서서 닫힌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수현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삶의 무게에 힘들어하는 엄마의 마른 등을 보았을까. 자기를 처음 보는 낯선 아저씨에게 전혀 걱정 없이 맡기고 가는 엄마의 모습에 놀랐을까. 저 문을 열고 자신도 엄마를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
수현은 현관문을 쳐다보는 윤지의 등을 쳐다보았고 윤지는 엄마가 나간 닫힌 현관문을 쳐다보았다. 그의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연이어 크게 들리자 윤지가 고개를 돌려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거든.”라고 말하는데 윤지의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듣고는 갑자기 그가 웃음을 터트렸고 그의 웃는 모습에 윤지가 자기의 배를 두 손으로 가리며 부끄러운 듯 피식하고 미소를 짓는데 수현은 그때 맑고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미소를 보았다.
수현은 식탁 위에 놓인 김밥이 들어있는 봉지가 생각이 나서 윤지에게 물었다.
“아저씨가 김밥을 사 온 게 있는데 혹시 윤지 김밥 좋아하니?”
윤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여전히 두 손으로는 배를 가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알루미늄 포일을 벗긴 김밥을 식탁에 앉아서 먹었다. 그의 몫으로 두 줄을 산거라 그에게는 김밥 한 줄이 양이 될 리가 없지만 그래도 냠냠냠 거리며 고사리 같은 손으로 김밥을 입에 넣어서 오물거리는 윤지를 바라보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에게 겨우 식은 김밥이나 먹이는가 싶어서 그런 마음이 들었는데 오히려 윤지는 배가 고팠는지, 김밥을 좋아하는지 맛있게 김밥을 먹었다.
그런 윤지가 목이라도 메이지 않을까 싶어서 윤지에게 물이나 우유, 주스 중에서 어떤 음료를 마실 건지 물어보자 윤지는 수줍게 그를 바라보며 우유라고 작은 소리를 말했다. 수현은 우유 두 잔을 따라서 윤지 앞에 한 잔을 놓고 다른 한 잔을 들고는 갈증이라도 난 사람마냥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 수현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윤지가 김밥을 먹다가 의자에서 내려와서 그의 앞에 오더니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고는 그의 입 주위에 묻은 우유를 닦아 주었다. 순간 그의 마음속 귀퉁이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쿵 하고 내려앉는 울림 같은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