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8시가 조금 넘어서 경숙이 수현의 집에 도착을 했다. 얼굴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경숙은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으음, 피자냄새. 저녁에 피자 시켜 먹었나 봐?”하고 말하며 코를 들어서 집안에서 풍기는 피자냄새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어, 엄마 페페로니 피자 먹었어. 맛있었어.”
“경숙이 너 저녁 먹었어? 먹지 않았으면 피자 남았는데 좀 먹을래?”
경숙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
“아직 저녁을 먹지 못했는데 잘됐네. 지금 수업 끝나고 바로 오는 길이거든. 내가 먹을 피자가 남았다면 사양하지 않을게.”
경숙은 식탁에 앉아 남아 있는 피자를 집고서 많이 배가 고팠는지 우걱우걱 입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 그녀에게 수현은 콜라를 따라 주었다. 수현과 윤지가 경숙의 피자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경숙은 두 개의 피자를 급하게 먹고는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가 혹시 커피 생각이 있냐고 물었고 두 사람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커피가 담긴 머그컵을 들고서 얘기를 나누었다.
“오늘 너무 고마워. 애 보느라 힘들었지? 너 아니었으면 오늘 정말 힘들었을 텐데.”
“내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다.”
“도움이 되었고말고. 오랜만에 만나서 폐만 끼치고......”
“그나저나 얼굴이 많이 피곤해 보여. 짐 가방도 무거워 보이고. 일은 어때?”
“힘들지 뭐. 차가 있으면 한결 수월할 텐데. 저 가방을 짊어지고 이 집 저 집 다녀야 하니깐 아무래도 힘들고 벅차긴 해. 그러나 애 하고 먹고살려면 할 수 없지 뭐.”
두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몰랐는데 윤지가 두 사람의 얘기가 지루했는지 아니면 하루가 고되고 피곤했는지 어느새 소파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소파에 잠든 윤지를 바라보던 그가 물었다.
“그런데 애 아빠는? 오늘 바쁜 일이 있는 거야?”
그의 질문에 가만히 커피가 들어있는 머그컵을 이리저리 손으로 돌리며 컵을 무심한 듯 쳐다보던 경숙이 입을 열었다. 혹시나 잠든 윤지가 들을까 봐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그녀가 말했다.
“윤지는 아빠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아빠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니.”
“내가 혼자 윤지를 낳고 길렀거든. 그 남자는 윤지의 존재를 아예 몰라.”
“음......”
잠깐 동안의 정적이 흐른 뒤에 그가 낮게 깔린 음성으로 말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많이 힘들었겠구나. 혼자서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경숙이 말없이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떴다.
“그 세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어. 갓난 애 재우고 밤에 혼자 앉아서 눈물을 흘리던 시간들이...... 매일매일 아이가 빨리 자라기만을 기도했던 것 같아.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어떨 때 보면 윤지 때문에 웃고 윤지 때문에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 것 같아. 나에게 윤지는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이자 내 생명이야.”
수현은 눈가가 촉촉해진 경숙을 바라보았다. 37살의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는 경숙의 얼굴이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아 기미가 잔뜩 끼어 더 애처롭게 느껴졌다.
커피와 함께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졌다. 아니 경숙의 얘기를 수현이 가만히 들어주는 시간이 더 많았다. 경숙은 수현의 집에서 버스로 다섯 정류장 떨어진 동네에 살고 있었다. 2층 주택이 대부분인 동네인데 1층에 세 들어 살고 있다고 했다. 그 동네로 이사를 온 지도 어언 5년이 되어간다고 하면서 그래도 지금 사는 곳은 주인아주머니도 그렇고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잠들어 있는 윤지를 잠깐 쳐다보던 그녀는 그에게 그녀가 학교를 졸업하고 살아온 그녀의 인생이야기를 조금씩 들려주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얘기를 하고 싶었는지 누군가 한 명은 자신의 이야기를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랐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수현에게 그녀가 살아온 인생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수현이 군대를 간 다음에도 여전히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며 생활비와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바쁜 생활을 했다. 누구나 한 번쯤 가보는 과 MT 한번 가보지 못한 그녀는 다른 애들과 달리 빡빡한 자신의 학창 시절에 대해 별다른 그리움도 없었고 그냥 하루하루가 지긋지긋했다. 어서 졸업을 하고 직장을 잡아 사회인이 되어 매달 월급을 받아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 조금은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꿈이었다.
학교를 다니며 늘 청바지만 입던 그녀는 역시나 과 동기들이 생각했던 대로 청바지를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옷이 없어서 늘 같은 옷만 입고 다닐 수밖에 없었고 그런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그녀가 청바지를 좋아하는 거로 착각을 하기도 했다. 물론 수현도 그렇게 생각을 잠깐이나마 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상황을 알긴 했지만.
그래서 생긴 블루진이라는 별명에 대해 그녀는 딱히 좋거나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때로는 청바지 밖에 입을 수 없었던 그런 현실이 너무나 싫었다. 그녀도 예쁘게 꾸미고 다니고 싶었고 등록금 걱정 없이 대학생활을 하고 싶었다. 연애도 하고 마음껏 공부도 하고 싶었고 친구들과의 추억도 많이 쌓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녀는 어렵사리 학교를 졸업했지만 아르바이트다 뭐다 너무 바쁜 나머지 공부할 시간이 많지 않아서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고 스펙이랄 것도 없어서 대기업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도 운이 좋다면 좋아서 그리 크지 않은 중소기업에 취직을 해서 나름 사회인으로 자리를 잡아갈 수 있었다.
워낙 처음부터 없이 시작을 했기 때문에 직장생활을 하는데도 돈을 모으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녀는 작은 단칸방에서 시작을 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원룸으로, 조금 더 크고 현대식인 원룸으로 넓혀 갈 수 있었다.
그녀가 직장생활은 한지 6년이 넘어갈 무렵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나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 부서의 부장이 여자직원에게 심술 맞게 군다는 얘기를 소문으로 들었던 그녀는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발령이 나고 한동안은 별일이 없이 지나가서 그냥 소문일 뿐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시던 부장이 조금 취하자 그녀에게 술을 권하며 은근슬쩍 신체를 접촉해 오는 일이 있었다. 그녀는 술이 취해서 그러려니 하고 얼른 자리를 이동하고 넘어갔는데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부장은 노골적으로 회사 내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말에서 성적 불쾌감을 느끼게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슬쩍 어깨를 만진다거나 스치는 척 엉덩이를 터치한다거나 퇴근 후에 따로 할 얘기가 있으니 좀 시간을 내달라고 요구를 하는 일이 이어졌다.
그녀는 두려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혼자 고민을 하는 시간이 늘어났고 누군가에게 상의도 하지 못한 채 혼자 속앓이를 해야 했다. 취직하기가 어려운 시기에 어디 다른 데로 이직할 데도 없는 그녀는 참을 수 있을 만큼 참고 또 참았다. 그녀가 참을수록 부장은 조금씩 더 대담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