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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숙녀 윤지 7

by 자작가 JaJaKa Mar 24. 2025

그녀가 한계에 다다랐을 때,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을 했을 때 그녀는 회사에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그녀의 편에서 얘기를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그녀가 꼬리를 쳤으니까, 잘 보이려고, 승진을 하고 싶어서 접근했다가 잘 되지 않으니깐 괜히 트집을 잡는 거다, 별 것도 아닌 일을 괜히 크게 만들어서 회사 이미지에 나쁜 영향을 끼칠 필요가 뭐가 있냐는 등의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같은 여자이면서 경숙에게 남자들의 편에서 서서 같이 돌을 던지던 여자직원들의 모습을 기억하며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같은 여자이건만 그들은 경숙에게 어떤 힘도 되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경숙에게 조금씩 거리를 두면서 뒤에서는 그녀의 험담을 했다.      


가해자인 부장은 멀쩡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회사를 다닌 반면 경숙은 피해자인데도 불구하고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결국 그녀만 이상한 취급을 받았고 정작 부장은 별다른 징계를 받지 않고 유야무야 끝나게 된 후 그녀에게 남은 것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저 멀리 한직으로의 발령이었다. 


눈물과 수치심으로 버티던 그 몇 개월의 기간 동안 경숙은 사람이 무서웠고 회사가 무서웠다. 그동안 즐겁게 다녔던 회사가 어느새 그녀에게 죽을 만큼 가기 싫은 고통스러운 장소로 변했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떠밀리듯이 회사를 나가야만 했다. 피해자는 그녀이건만 떠나야 하는 사람은 그 부장 놈 이어야 하건만 정작 회사를 떠난 사람은 아니 나가도록 종용을 받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회사를 나오고 나서 그녀는 한동안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억울하고 분했고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 슬펐다. 아무런 힘이 없는 연약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두문불출하며 보내던 6개월이란 시간 동안 그녀는 너무나 망가졌고 피폐해졌다. 그 부장을 찾아가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두 번 한 것이 아니었다. 그를 죽이고 자기도 죽어버리려고 수없이 생각을 했다. 


그렇게 집에서 두문불출하고 자존감도 바닥이 나서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며 고립되다시피 지내던 그때 시골에 있던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그녀는 오랫동안 발길을 하지 않았던 고향집에 갔다.    

  

그녀가 어렸을 적에 살았던 낡은 슬레이트집은 그 모습 그대로였다. 오랫동안 가정을 돌보지 않고 객지를 떠돌다가 늘그막에 가진 것도 없이 슬그머니 집으로 들어온 아버지는 객지생활을 오래 한 탓인지 술을 많이 마신 탓인지 집에 돌아온 후 얼마 안 있다가 병을 얻어서 시름시름 앓다가 그녀의 어머니에게 간병이라는 또 하나의 짐을 지우고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방에 누워서 2년이라는 세월을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며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죽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그녀가 어린 시절에 본 놀기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모습만 있었다. 그녀에게 딱히 기억나는 모습이 거의 없었다. 술 먹고 취해서 들어오면 괜히 그녀의 어머니에게 술주정을 하며 소리를 지르던 모습만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한번 손잡고 놀러 간 적도 없었고 한번 따뜻하게 기대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그녀의 아버지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그를 보러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두 모녀를 버리고 집을 나간 이후에 그녀에게 아버지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의 아버지가 죽었다고 해서 그녀가 왜 갑자기 그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내려갈 생각을 했는지는 그녀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어쩌면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집에서 두문불출하며 지내던 그녀가 갑자기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고, 그녀의 원룸에서 탈출해 세상으로 다시 한걸음을 뗄 기회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 됐든 고향에 내려갔다가 낡고 허름한 슬레이트집에서 며칠을 지내고 온 이후에 그녀는 다시금 세상으로 나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한쪽 다리를 다쳐서 다리를 절고 있는 어머니의 앙상하게 마른 주름진 얼굴과 고생을 많이 해서 등나무 가지처럼 딱딱해진 손마디를 보며 예전 모습 그대로인 누추한 집을 보고서 그녀의 마음에서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인지는 모르겠다.


고향에 다녀온 이후에 그녀는 새로운 직장을 찾기 위해 노력을 했고 그러다가 한 직장에 취직을 했다. 30살이 된 그녀가 취직한 직장에서 그녀는 외국에서 온 영어로 된 서류를 한글로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그녀는 다시 옆에다가 영한사전을 놓고서 마치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 마냥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그 직장을 다닌 지 1년쯤 지날 무렵 그녀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한 남자를 만났다. 외로웠던 그녀에게 특히나 자상하게 대해주던 그 남자에게 정을 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자연스레 흘러가는 마음의 흐름을 그녀 자신도 어쩌지 못했다. 유부남이고 가정이 있는 사람이야, 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버지 사랑을 못 받은 그녀에게, 따뜻하게 기댈 수 있고 아버지 같은 넉넉한 품이 그리운 그녀에게 그 사람은 한줄기 빛과도 같았다.      


그와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공원을 거닐며 얘기하던 그 시간들이 그녀에게는 행복 그 자체였다. 그녀만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고 따뜻하게 말을 걸어주고 들어주던 그에게 그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고 오빠의 모습을 보았으며 애인의 모습이 느껴졌다. 그 두 사람은 육체적인 관계가 없이 그렇게 교류를 했다.      


비밀리에 만난다고 해도 비밀이 있을 수가 없는지라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조금씩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들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만남을 가져서는 안 되겠다고 말하던 그와 술을 마시면서 마지막 만남을 슬퍼하며 울면서 술잔을 기울이던 그날, 오늘이 지나면 더 이상 직장동료, 직장 선후배 사이 이외에 아무런 관계가 아닌 것이 되는 그날, 이제는 회사 밖에서 그와 차를 마시며 식사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그날, 그의 부드러운 눈빛과 따뜻한 말을 들을 수 없고 그윽한 로션냄새를 더 이상 맡을 수 없게 된 그날,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해 준 그와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던 그날, 쌓여가는 빈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술잔을 기울이며 그의 어깨에 기대어 울며 가는 밤을 아쉬워했던 그날, 그녀는 그와 밤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직장 선후배로 돌아갔다. 직장에서 지나가다 봐도 그들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지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내는 일이 그녀에게는 너무나 가슴이 아리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는데 그는 적어도 그녀가 보기에는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고 할까, 잘 지낸다고 해야 할까, 곧바로 현실에 적응해 나간다고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이 들도록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아마도 가정이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녀와 마주치더라도 잘 모르는 사람인 양 그렇게 지나쳐 갔다. 때로는 그의 반응에 섭섭했고 때로는 혼자만 아프고 힘들어하는 것 같아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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